딸이 써주는 자서전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하소연을 하니 오히려 어머니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너를 시집보내 놓고 우리 집이 쫄딱 망했어. 너랑 살 때는 낙동강 하천 부지 땅을 많이 개간해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한다면서 하천부지 땅에 농사도 못 짓게 하니 먹고 살길이 없어졌어. 네가 복덩어리라 우리 먹을 것까지 다 가지고 갔는데 왜 그렇게 못 사냐.”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어머니 손을 잡고 울었다. 어머니가 잘 살라고 시집보냈는데 끼니때마다 먹을 걱정부터 해야 하니 시집 안 갔을 때보다 더 못하고 고생스러웠다. 한심한 신랑이랑 살면 살수록 더 힘들어지고 앞길이 막막했다. 시집가기 전에 이모네 집에 다니면서 ‘살다 살다 힘들면 이 소에 빠져 죽어야지’ 하며 봐 둔 소가 있었다.
그날 저녁 친정에서 저녁을 일찍 먹고 나와 소로 갔다. 그 소 이름이 금소인데 낙동강 물이 겁나게 깊었다. 그곳은 바로 도로가여서 도로에서 치마폭을 덮어쓰고 뛰어내리기만 하면 절대로 나오지 못하고 죽는 곳이다. ‘내가 미리 봐 둔 곳까지 가서 죽어야지’ 하며 금소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가 밤 열두 시였다. 그런데 헌병들이 타는 백차가 소 주변을 뺑 둘러싸서 일반인들은 그 근방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여기 왜 못 들어가게 하지요?”
“군인들이 트럭에 돌을 싣고 가다가 차가 소로 넘어가서 짐칸 돌 위에 앉았던 군인 네 명이 물에 빠져 죽었대요. 지금 군인들 시체를 찾고 있다나 봐요.”
죽으러 갔다가 나보다 한발 미리 죽은 사람들이 있어서 죽지도 못하고 우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기차역까지 왔는데 새벽이었다. 그 이른 시간에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았다. 맹호부대 월남 파병 환송 인파였다. 군인들은 이미 기차에 탔고 군인들 부모들이 잘 갔다 오라면서 손을 흔들며 울고 있었다. 이런저런 구경만 실컷 하고 집에 와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신랑은 누웠다 벌떡 일어나서는 혼내기 시작했다.
“처갓집에서는 집에 갔다고 하고 집에 와보니 집에도 없고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맹호부대 월남 가는 거 구경하고 오는 길이에요.”
대충 둘러대고 피곤해서 그냥 잤다.
남편은 보험 회사에 다니긴 했다. 보험을 팔아야 수당을 받는데 팔지 못하면 수당도 없었다. 남편은 사람 꼬시는 능력이 없어 돈도 못 벌고 건들거리며 놀기만 했다. 내가 힘이 들어도 할 수 없이 청량리 할머니랑 서울까지 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랑 같이 다니면서 장사를 하려니 할머니 것까지 내가 다 날라야 하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혼자 장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밑천이 필요해서 작은 시누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시누도 목돈이 없어 계주를 소개해 주었다.
“내가 지금 5만 원짜리 계를 하고 있는데 모두 스무 번을 넣어야 해. 1번은 개오야가 타고 2번은 동서 것으로 잡아줄게. 내가 희생 번호 갖고. 한 번만 돈 넣으면 곗돈 타니까 그걸 밑천으로 장사해 봐.”
곗돈을 타서 할머니 없이 나 혼자 말린 고추랑 빨갛게 익은 홍시, 단감 같은 것을 사서 청량리 청과시장에 갔다. 거기서 경매도 하고 말린 고추는 개인 상점에 갖다 팔기도 했다. 그렇게 장사해서 곗돈 넣고 겨우 밥 먹고 살 수 있었다.
살다 보니 또 애가 들어서서 배가 불러왔다. 또 유산될까 봐 쉬고 있는데 시댁에서 담배 농사를 많이 지으니 일 좀 거들어 달라했다. 밑천을 신랑에게 주고 장사해서 다달이 들어가는 곗돈 좀 넣으라고 하고 시댁에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계오야한테 연락이 왔다. 신랑이 고추하고 홍시 한 차를 싣고 강원도 춘천에 갔는데 두 달이 지나도 집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
안동 집에 와서 남편이 간 곳을 수소문해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가서 보니 신랑이 고추랑 감을 한 상점에 외상으로 팔았는데 상점 주인이 그걸 판 돈으로 노름을 해서 돈을 다 날려버렸다고 했다. 신랑은 돈도 못 받고 상점 주인이 돈 줄 때까지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당장 상점 주인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뱃속의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으니 차비라도 해 주면 같이 떠날게요.”
상점 주인은 진짜 우리에게 차비만 주었다. 둘이 집에 와서 아기를 낳았는데 차를 너무 많이 타서 그런지 죽은 아기를 낳았다.
신랑에게 장사 밑천 맡긴 것도 그렇게 뺏겨 버리고 곗돈도 넣어야 하는데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시원찮으니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대구에서 사는 이종 형부가 막걸리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다 못해 이종 형부더러 신랑 취직자리를 부탁했다.
“우리 김서방도 막걸리 회사에 취직 좀 시켜줘.”
“마침 술배 달하는 자리가 비었으니 대구로 오라고 하세요.”
하지만 술 배달하는 월급이 대구 집세보다 적어서 내가 같이 가서 살 수가 없었다. 막걸리 회사 사장이 우리 처지를 알고는 사장 부모님 집에 빈방이 있으니 공짜로 와서 살라고 했다.
사장 부모님 집에 이사를 와서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심부름하는 여자아이 이렇게 셋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자 밥 먹으면 밥맛이 없으니 같이 먹자면서 끼니때마다 불렀다. 나는 그 집에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식모살이랑 다름없이 두 노인을 돌보며 살았다. 그 집은 대구 변두리라 땅이 넓어 큰 돼지우리에 돼지도 많이 먹이고 있었다.
“여보, 돼지 한번 먹여보게 저도 돼지 한 마리 사주세요. 그리고 집에 올 때 돼지 먹이게 술 찌기미도 갖다 주세요.”
이웃집에서 돼지 두 마리를 사 정성 들여 키웠다. 새끼 돼지 두 마리가 큰 돼지로 자라 두 마리 모두 새끼를 뱄고 새끼 나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은 막걸리 공장에서 술 배달도 하고 술도 많이 마셨다. 술집 색시들이 한잔 하고 가라고 하면 한잔 하고 또 그 여자들이 한잔 사달라고 하면 사주기도 하면서 술에 취해 제시간에 공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값 받아온 것을 다른 직원들이랑 같이 결산해야 하는데 신랑이 제시간에 들어오지 않으니 직원들이 몇 번이나 제시간에 들어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도 신랑 술버릇은 여전했다. 하루는 신랑이 또 공장에 제시간에 안 들어오니 관리인이 직원을 풀어 신랑을 찾았다. 찾으러 가보니 배달 자전거는 달성 공원에 버려져있고 술통은 바람에 굴러다니고 신랑은 달성 공원 중턱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고 했다. 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신랑이 막걸리 공장을 그만두었으니 우리는 더 이상 사장 부모님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장 아버지는 내가 워낙 일을 잘하니 이사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했는데 신랑은 뭐가 꼬였는지 자꾸 이사를 가자고 했다. 나는 이사를 가면 당장 집세도 줘야 하는데 돈도 없고 돼지도 새끼 날 달이 되어 이사를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신랑이 하도 이사 가자고 해서 사장 부모님네 집 바로 뒷집으로 이사를 갔다. 뒷집에도 돼지우리가 있어 우리 돼지 두 마리를 거기로 옮겼는데 부정을 탔는지 두 마리 다 죽은 새끼를 낳았다. 이렇게 돼지 새끼 치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 수중에는 어미 돼지 두 마리만 남았는데 신랑은 돼지를 팔아 술장사를 하자고 졸랐다.
신랑이 직장이 잃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사 간 집 뒤 공터에 천막을 치고 술장사를 했다. 집 옆에는 육군 사단이 크게 있어 군인 상대로 장사가 잘 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배 속에 아기가 생겨 술장사를 하려니 정말 힘들었다. 먹고살자니 할 수 없지 하면서 신랑이랑 나랑 둘이 장사를 하는데 하루는 깡패들이 와서 잔뜩 먹고는 돈을 안 주고 그냥 가려고 했다. 돈 내놓고 가라고 하면서 입은 옷을 잡고 안 놔주니 그 놈들은 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을 쳤다. 이렇게 술장사는 해봐야 사람들이 일단 먹고 돈이 없다면서 배짱을 부리니 돈도 못 벌고 빚만 지게 됐다.
그러던 차에 신랑 팔촌형이 우리 가게에 술 먹으러 와서 신랑에게 말을 건넸다.
“동대구 기차역을 크게 짓고 있는데 여기서 술장사 하지 말고 밥장사를 해보는 것이 어때? 동대구 역 짓는데 하청을 받아 일을 하고 있거든.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 한 이십 명 돼. 함바집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함바집 하려면 인부들이 먹고 살 큰 집이 있어야 하잖아요.”
신랑은 신랑 팔촌형 말을 듣고도 시큰둥했다.
“동대구 역 주변이 전부 정부 땅이니 아무 곳이나 집을 지어서 하면 돼.”
신랑이랑 나는 신랑 팔촌 형 말대로 인부들이 일하는 곳 가까이에 흙벽돌을 찍어 말렸다. 우리 둘이 흙벽돌로 담을 쌓고 신랑 팔촌형이 지붕이랑 문은 알아서 해 주었다. 또 방도 만들었는데 우리 두 사람 잘 방은 작게 짓고 이십 명 인부들이 잘 방은 크게 지었다. 이렇게 집을 후다닥 짓고 바로 함바집을 열었다. 나는 임신한 상태로 함바집을 하면서 밥도 팔고, 술도 팔면서 그렇게 몇 달 장사를 했다.
동대구 역이 거의 완공될 즈음, 초겨울에 아기를 낳았다. 음력 10월 30일에 첫딸을 낳아 놓고 밖에 나와 보니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내 무릎이 빠질 정도였다. 그때까지 아기 옷이나 기저귀도 사다 놓지 않아 아기를 이불에 꽁꽁 싸 냉골 바닥 중 사람 앉을 만큼 따뜻한 곳이 있어 그곳에 아기를 눕혀 놨다. 아기는 바싹 말라 형체만 만들어져 있는 게 조막 덩어리 만했다. 그 아기를 낳아 놓고 돌아 나와 신랑이랑 나랑 둘이 인부들 이십 명분 밥을 해 주었다. 원래 밥값은 보름에 한 번씩 주는데 한 달이 다 되어도 돈을 안 줘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긁어모아 밥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인부들이 마지막 일한 돈을 찾아 갖고는 밥값도 주지 않고 모두 다 도망을 가 버렸다. 신랑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도 가져가고 신랑 옷까지 다 입고 가서 남은 것은 우리 딸과 두 내외 몸뚱이뿐이었다. 우리는 신랑 팔촌형을 찾아갔다.
"형, 우리가 못 받은 밥값 좀 계산해 주세요."
"미안해, 나도 이번에 하청을 받아 일을 했는데 본사에서 적자가 났다고 인건비를 안 줘서 나도 돈이 없어. 인부들 만나면 받아줄게."
형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떠난 인부들을 어떻게 만나겠으며 혹시 인부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들이 돈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밥 값을 줄 사람들이라면 떠나기 전에 줬을 테고 신랑 자전거랑 옷까지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스란히 돈을 다 떼이고 우리는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