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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Sep 27. 2021

47년생 엄마 #8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4장 속은 결혼(19~24세)


힘든 대구 생활     


  우리 세 식구는 신랑이 노가다 같이 했던 친구 소개로 대구 버무동에 월세방을 얻었다. 그 방은 월세 천 원짜리로 부엌도 없고 찬장도 없었다. 밥 먹은 그릇을 놓을 데가 없어 사과상자 하나를 얻어다가 엎어 놓고 그릇을 씻으면 사과 상자에 넣어 놓고 밥 먹을 때는 그릇을 위에 놓고 먹었다. 


나는 집에서 아기를 보고 신랑이 노가다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동대구역에서 밥장사를 해 그나마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소개해줘서 신랑은 쉽게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보름 동안 일하면 품삯을 받는데 신랑은 그 돈을 집으로 갖고 오는 게 아니라 먼저 외상으로 먹은 술집으로 갔다. 술집 아주머니가 술값 갚았다고 공짜 술 한 잔 주면 그 공짜 술에 한잔 더, 한잔 더 하며 품삯 절반을 다 써버렸다.

“아니, 이렇게 돈을 조금 갖다 주면 어떻게 보름을 살아요? 당신 도시락도 싸야 하는데! 다음에는 꼭 집에 먼저 들러 돈을 갖다 줘요.”

“다음에는 꼭 먼저 갖다 줄게.”

울고 난리를 치면서 신신당부를 해도 신랑은 꼭 갖고 온다는 말만 해 놓고 번번이 술을 먹고 와 내 속을 뒤집었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가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방이라고 우리 세 식구 겨우 자는데 시아버지가 오시면 며칠씩 계시다 가셨다. 돈은 없는데 시아버지가 오시면 갈 때 차비도 드려야 하고 먹을 것도 신경 써야 해서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살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안동 작은 시누랑 같이 했던 오만 원짜리 곗돈 계오야가 돈 받으러 우리 집을 물어물어 찾아왔다.

“아기 엄마, 내가 돈 받으러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네. 곗돈 밀린 것 계산해주게.”

“할머니, 제가 당장 끼니도 이어가기 힘든데 무슨 돈이 있어 돈을 드리겠어요. 조금만 참아 주세요. 돈이 생기는 대로 갚아 드릴게요. 그나저나 오늘은 너무 늦어서 안동에 가시기 힘들 것 같으니 여기서 자고 내일 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할머니 신발을 깨끗이 빨아드렸다. 할머니도 방은 좁지만 우리 집에서 자고 가셨다. 그 뒤에도 계오야 할머니가 대구에 왔다 집에 돌아가기 어중간하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셨다. 내가 돈 못 준 죄로 할머니가 오시면 우리 시어머니처럼 정말 잘해드렸다.

“자네는 젊은 사람이 악기(惡器)도 없고 돈 받으러 온 사람을 자기 가족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니 앞으로 정말 잘 살 거야.”

계오야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가신 뒤로 다시는 우리 집에 돈 받으러 오지 않았다.      


둘째 아이 출산     


  대구 버무동으로 이사 간 지도 벌써 1년이 지나고 2년에 접어들 무렵, 늦은 가을에 둘째 아이를 가졌다. 겨울을 나려면 양식이나 연탄 같은 것을 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신랑은 번번이 품삯을 들고 술집으로 갔다. 돈 나오는 날 아침에 출근하는 신랑을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번에 돈 받으면 중간에 새지 말고 꼭 집으로 갖고 와요.”

이렇게 부탁해 놓고도 신랑이 못 미더워 우리 집 근처에 신랑이랑 같이 일하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아저씨, 신랑이 이번에도 돈 안 갖고 오면  겨울에 우리 식구 다 굶어 죽어요. 퇴근할 때 신랑 뒤를 따라오다가 신랑이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저에게 꼭 알려 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신랑이 퇴근할 즈음에 아저씨가 헐레벌떡 우리 집에 오셔서 신랑이 술집에 갔다고 알려주었다. 아기를 업고 정신없이 술집 골목을 찾아갔다. 그 골목에는 술집이 죽 하니 들어서 있어 신랑이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막무가내로 술집에 들어가 남편을 찾았다. 첫 번째 집, 두 번째 집을 둘러봤는데 신랑이 없었다. 드디어 세 번째 집구석에서 신랑을 발견했다. 인부들 한 다섯 명 정도가 앉아서 술을 먹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신랑을 불러냈다.

“집에 큰 문제가 생겼으니 빨리 나와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신랑을 데리고 나오니 술집 주인이 우리 내외를 붙들었다.

“술을 시켰으면 술값을 내고 가요.”

“아주머니, 안에 사람들이 술 먹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받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신랑을 앞세워 술집을 나왔다. 술집을 나와서는 남편 주머니를 뒤져 돈을 다 빼앗았다.

 

  다음날 그 돈으로 쌀 80kg 한 가마니와 겨울 날 수 있을 만큼 연탄을 샀다. 이렇게 해서 겨우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옆집 아저씨는 신랑보다 돈도 더 많이 버는 인부였는데 우리가 쌀 삼분의 일도 다 안 먹었을 때 쌀이 없다고 우리 집에 쌀을 꾸러 왔다. 노가다 일은 겨울에 일이 없으니 가을에 봄까지 먹을 준비를 해 놔야 했다. 내가 그렇게 살림을 알뜰살뜰히 해도 신랑이 워낙 돈을 조금 벌어다 주니 우리 아기는 못 먹어서 너무 말라 다리가 배배 꼬였다. 


  그런 상황에 그 해 동짓달 25일에 둘째 아기를 낳았다. 아들을 낳으려고 했는데 또 딸을 낳아 서운했다. 돈이 없으면 아기 성별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안 되니 속이 상했다. 둘째 딸을 낳아놓고 밤새 엉엉 울었더니 다음날 눈이 팅팅 부었다. 아기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몸 풀었다고 집안 식구들 중에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 아기 낳고도 그 이튿날부터 일어나 밥 해 먹고 빨래하고 그렇게 살았다.

      

집을 나오다     


  겨울이라 신랑은 노가다 일도 없어 여기저기 사람들만 만나러 다녔다. 어느 날 고향 친구 하나를 만났는데 신랑이랑 둘이 합자로 술을 만들어 돈을 번다고 했다. 고향 친구 말만 믿고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술장사를 할 수 없으니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는 방도 있고 창고도 있었다. 신랑은 술 담으려면 큰 단지도 사야 하고 밀가루도 사야 하니 나더러 돈을 구해 오라고 했다. 아기 둘을 데리고 돈을 구하러 안동 친정에 갔다. 어머니한테 사정을 말하고 돈을 좀 꿔 달라고 했다.

“내가 그 큰돈이 어디 있어서 너한테 주겠냐. 네 시누네 집에 가서 알아봐라.”

어머니는 돈 빌려달라는 말에 더 말을 섞어 볼 수도 없이 내차게 거절하셨다. 


  가족 중에 좀 살만한 작은 시누네 집에 가서 돈을 꿔 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시누는 내 사정을 듣고 ‘형님아, 돈 여깄어.’하며 얼른 돈을 내주었다. 그 돈을 신랑에게 갖다 주고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나 보다 했는데 신랑이 그 돈을 동업하는 고향 친구에게 다 줘버리고는 손 놓고 있는 것이었다. 고향 친구가 그 돈을 혼자 다 써 버려 우리는 빌려 온 5만원을 십 원 한 장 써보지도 못하고 그냥 뺏겨 버렸다.

 

  술장사는 해야겠고 돈은 없고, 이사 간 집 안집이 쌀가게 여서 그곳에 사정한 후 돈을 빌렸다. 그 돈으로 단지 세 개를 사고 밀가루, 누룩 등 필요한 재료를 사 술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번을 만들어도 다 실패해서 술을 수체 구멍에 버리는데 정말 기가 막히고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아기가 둘이나 되니 빼도 박도 못 하고 집에서 아기를 봐야 하기 때문에 나가서 돈도 벌 수 없었다. 이렇게 신랑은 돈도 안 벌어오고 빚만 지고 돌아다녔다.

 

  아기 젖도 줘야 하는데 너무 배가 고파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이종 사촌 언니를 찾아갔다. 그 언니네 집을 찾아가려면 한 십 리(약 4km)를 걸어가야 했다. 맨몸으로 가도 먼 길을 기저귀 보따리를 들고 큰애는 업고, 둘째는 안고 갔다. 언니네 집에 가서는 우선 아기들을 골방에 눕혀놓고, 언니네 집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다 해 주었다. 그렇게 일하고 저녁밥까지 해 먹고 나서 신랑 줄 밥 한 그릇을 싸가지고 또 그 먼 길을 걸어왔다. 낮에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다시 아이들 데리고 집에 오면 정말 지쳤다. 하루 왕복 8km를 걸어 다니면서 밥 얻어먹고 살겠다고 그런 생고생을 하며 사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어쩌면 내 신세는 친정엄마를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있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런가.’

집에 오면서 이렇게 신세한탄을 했다.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마저도 일요일에는 언니네 집에도 갈 수가 없었다. 이종 형부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일요일에는 학교를 가지 않으니 형부 보기 미안해서 우리 세 식구가 거기서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일요일이 되면 집에는 쌀도 없고 돈도 없어 주인집에 쌀을 꾸러 갔다.

“아주머니, 쌀 한 되만 외상으로 주세요.”

“아니, 그나저나 방세는 언제 줄 거야?”

주인아주머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쌀 한 됫박을 퍼 주었다.  쌀 삼분의 일만 밥을 짓고 삼분의 일은 식혜를 만들고 나머지는 아침밥을 해 먹으려고 남겨 놓았다. 저녁에 신랑이 오면 같이 먹으려고 밥 두 그릇을 담아놓고 큰 딸은 먼저 밥을 먹여서 재웠다.

 

  신랑 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는데 저녁 늦게 돈 오 만원 빌려주었던 고향 친구를 데리고 와서 저녁밥을 달라고 했다. 둘은 그 밥을 먹고 다시 볼일이 있다면서 나갔다. 내 몫인 밥 한 그릇을 신랑 고향 친구에게 내주고 나는 점심도 굶었는데 저녁까지 굶으니 눈을 감고 자려고 해도 배가 고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둘째 아기는 백일도 안 지났는데 젖 달라고 울어댔다. 먹은 것이 없으니 젖이 나오지 않아 아기는 밤새 빈 젖을 빨다 지쳐 잠이 들었다. 나도 깜빡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신랑은 친구하고 술 한 잔 하고 와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럭저럭 날이 새어 아침밥을 해 먹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아침 먹고 나서 식혜 담아 놓은 것을 작은 옹기 단지에 담아가지고 머리에 이고, 네 살 먹은 큰 딸은 앞세우고, 둘째는 업고 한참 걸어 약 장사하는 데로 갔다. 거기는 약장사하는 사람들이 신기한 구경을 시켜주니 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구경꾼들에게 식혜를 팔았다. 반 단지쯤 팔고 남은 것은 도로 머리에 이고 집에 와 보니 신랑은 아직도 네 날개를 펴고 자고 있었다. 자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신랑을 막 두들겨 깨웠다.

“나 정말 이렇게는 못살겠어. 우선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파 못 살겠고, 당신한테 돈만 주면 다른 사람에게 다 뺏겨 억울해서 못 살겠어. 가장이 가정을 꾸려갈 생각을 해야지. 당신은 아무 대책이 없잖아. 당신 같은 사람하고 더는 살 수가 없어!”

울화통이 터져서 한바탕 독한 말을 쏟아내고는 옷이랑 기저귀랑 한 보따리 싸서 머리에 이고 아기를 앞세워 집을 나왔다.

 

  그때가 오후 네 시쯤이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배가 고팠다. 큰 아이는 배가 고프니 걸어가려고 하질 않았다. 나도 배가 고파 걸어가느라 지쳐서 힘든데 큰 아이가 그 자리서 꼼짝도 않고 자꾸 안으라고 하니 옷 보따리이고 아기 업고 또 하나 안고 가려니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갈 수가 없어 조금 가다 혹시나 아기 아빠가 뒤에 따라 오려나 하면서 뒤를 돌아보고 또 조금 가다 뒤를 돌아보고 하면서 동대구 역까지 겨우겨우 갔다. 우리 집에서 동대구역까지 5km쯤 되는데 아이들이랑 같이 오느라 역에 도착하니 밤 막차를 탈 시간이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지쳤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차표를 끊으려니 식혜 판 돈으로는 돈이 조금 모자랐다. 차표 끊는 사람에게 사정을 해보았다.

"돈이 조금 모자라는데 이 돈으로 차표 끊어주시면 안 될까요?"

"안됩니다. 다음 분 오세요."

"제 표하고 이 아주머니 표 두 장 주세요."

 내가 사정하는 소리를 듣고 내 뒤에 차표 끊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돈을 보태줘서 겨우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막차라 기차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많아 앉을자리도 없었다. 아기 하나는 업고, 다른 하나는 안고 섰는데 아기들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업은 아기도 울고 안고 있는 아기도 울었다. 아기들이 자꾸 우니까 어떤 학생이 자리를 양보했다. 자리에 앉아서도 아기들은 배가 고프니 자꾸 울었다. 어떤 신사 아저씨가 기차 안에서 과자랑 음료수 파는 걸 보더니 우유 한 병을 사주면서 아기에게 주라고 했다. 그 우유를 먹고 큰애가 잠이 들었다. 큰애가 자니 작은 애도 잤다. 자는 아기들을 들여다보면서 엄마 생각도 나고 아기들에게 미안해서 나도 자꾸 눈물이 났다.

    

첫째야, 미안해     


  안동 역에서 내려 친정에 가려면 다시 5km는 걸어야 했고 큰 시누네 집은 1km 정도 걸어가면 되었다. 친정까지는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큰 시누네 집까지가서 대문을 두드리고는 그 길로 쓰러져 버렸다. 형님이 나와서 나를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니 이 밤중에 동생은 어쩌고 자네 혼자 애 둘을 데리고 왔어?”

“형님, 밥 좀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파요.”

배가 너무 고파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밥을 달라고 하니 얼른 밥을 차려 주었다. 밥을 먹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날 배고픈 서러움이 최고 서럽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새고 다음날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어머니, 나는 죽어도 김서방 하고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집에 한참 크는 남자아이 둘이 있으니 내가 온 것을 반겨하지 않았다.

“그럼 네 언니 집에 가볼래?”

“언니네 집에 갈래도 아기가 하나면 모를까 둘이나 되니 아기 둘을 데리고 어디를 가겠어요. 어머니가 첫째 좀 봐주세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부탁했지만 어머니는 안 된다고 했다.

“너도 눈칫밥 먹여 가면서 간신히 키웠는데 손녀딸까지 맡아 줄 수는 없어. 첫째는 네 시누네 집에다 데려다주고 가.”

어머니는 돈 만원을 주며 언니네 집으로 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큰 딸을 맡기러 작은 시누네 집에 갔다. 작은 시누네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 큰 딸이 더 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시누 집에 큰 딸을 떼놓겠다고 마음먹으니 거기까지 가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키우지’ 하면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작은 시누 네를 찾아가 시누에게 거짓말을 했다.

“우리 첫째 좀 데리고 있어. 읍내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그래, 형님아, 빨리 갔다 와. 내가 첫째 잘 볼게.”

작은 시누는 이렇게 말하면서 큰딸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집을 나오는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어릴 때 의붓아버지한테 매 맞고 설움 당했는데 큰딸도 엄마와 떨어져서 나 같은 고생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였다.

 

  형부는 경찰인데 군산으로 발령 나서 언니가 전라북도 군산에 있었다. 언니네 집에 가려면 중간에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경북 안동에서 전북 군산까지 기차로도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 먼 길을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아기도 없을 때, 금소에서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죽으러 갔는데 나보다 앞서 아까운 청년 군인들이 네 명이나 죽었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까운 군인 네 명 데려가지 말고  하나 데려가시지. 하느님, 내가 이렇게 사는 꼴을 보시려고 를 안 데려갔나요? 이제는 아이가 둘이라 죽으려고 해도 죽지도 못해요.’

이렇게 군산 가는 기차 안에서 하느님께 한탄을 했다. 그리고 큰딸에게 미안한 마음도 전했다.

‘첫째야, 너를 고모네 집에다 떼 놓고 가서 엄마가 정말 미안해. 꼭 돈 많이 벌어서 너를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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