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Sep 28. 2021

47년생 엄마 #9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5장 군산에서 다시 시작(24~35세)     


한복 학원  

   

  군산 역에 도착해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을 헤맬지 모른다며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언니네 집은 창성동이었다. 택시 타고 언니가 말한 주소로 가다 보니 언니가 나와 있었다. 집에 들어가 언니를 마주 보고 앉으니 눈물부터 났다.

“언니,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너 한복 바느질하는 것 배워볼래?”

것도 괜찮겠다 싶어 본다고 했다. 언니가 학원 비 한 달치를 내주었다. 한복 학원은 명산 시장 근처였다. 한복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았다. 줄자로 치수를 재고 종이에 본을 떴다. 한글도 잘 모르고 숫자 계산도 못하는데 센티미터(cm) 같은 치수는 더 헷갈리고 어려웠다. 언니가 학원비 한 달치를 미리 내지 않았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돈이 아깝기도 하고 막상 그 학원 안 다니면 어디 갈 데도 없어 매일 학원에 다. 몸은 학원에 있지만 한복을 잘 만들 자신도 없고 바느질이 손에 잡히지도 않아 내 마음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 잡고 바느질을 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복학원(난로 오른쪽 첫번째로 앉아있다)

  학원 갔다 올 때까지 둘째 아이는 언니가 봐주었다. 형부가 점심밥을 먹으러 오면 아기가 꼭 밥상 밑에다 똥을 쌌다고 했다. 언니는 나를 위해 아기도 봐주고 동네 사람들한테 동생이 한복 잘 만든다면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언니를 봐서라도 한복 만드는 기술을 열심히 배워야 는데 바느질은 영 나와 맞질 않았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나고 또 학원 비를 낼 때가 되었다.

“언니, 바느질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나 학원 그만 다닐래.”

“너, 한복 바느질 잘 배워서 깨끗하게 돈 벌고 살라고 했더니 못한다고 하면 어떡해. 나도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으니 안동 친정집으로 가.”

언니는 차비하라고 돈 만원을 주며 나를 친정집으로 보냈다.         


장삿길로 들어서다     


‘친정집에 가느니 일단 대구 집에 가보자.’

기차를 타고 가면서 갈 길을 다시 정했다. 그런데 정작 대구역에 내려서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대구역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큰 시장에 들어섰다. 둘래 둘래 살펴보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스뎅 그릇 파는 상점 앞에서 그릇을 사느라 난리이었다. 나도 그릇 파는 것을 한참 쳐다보다가  저 그릇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뎅 그릇 이것저것 고루 골라서 모두 만원 값을 샀다. 박스에 단단히 포장해 달라고 해서 그걸 이고 아기 업고 대구 기차역까지 갔다. 무거워 죽는 줄 알았다. 스뎅 그릇을 잔뜩 싣고 대구에서 다시 군산 언니네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언니는 대문에서 스뎅 그릇을 머리에 인 내 얼굴을 보면서 난처해했다.

“또 왔어? 그래, 잘 왔어....”

말은 잘 왔다고 하면서도 언니는 안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네 집에서 조금 내려오면 유가꼬 시장(지금의 명산 시장)이 있는데 거기 시장 구석에 박스를 깔아놓고 스뎅 그릇을 늘어놓고 팔았더니 정말 잘 팔렸다. 내가 스물네 살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까만 무쇠 솥, 뚝배기를 주로 쓸 때였다. 스뎅 그릇은 무쇠 솥보다 가볍고 뽀독뽀독 잘 닦이고 반짝거리니 아줌마들이 좋아했다. 스뎅 그릇 만원 값을 사 왔는데 본전 하고도 그릇이 삼분의 이는 남았다. 그걸 다 팔고 군산 구시장 큰 그릇 집을 찾아가서 스뎅 그릇 장사하게 싸게 달라고 했더니 대구에서 사 온 것보다 더 싸게 주었다. 한동안 스뎅 그릇을 열심히 사다 팔았다.

 

  그런데 옆자리에서 아줌마 한 분이 옥수수를 쪄서 놓고 파는데 잘 팔렸다. 스뎅 그릇은 무거워서 옮기는데 힘이 드니 옥수수 장사나 해볼까 하고 집에 와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옥수수는 어디서 사야 돼?”

“군산 역 새벽 장에 가면 생 옥수수를 많이 팔아.”

이튿날 새벽 4시에 고무 대야 하나 들고 새벽 장에 가보니 시골사람들이 옥수수를 많이 갖다 놓고 팔고 있었다. 일단 백 개를 달라고 했다. 장사꾼이 다섯 개를 덤으로 주었다. 백 다섯 개 값은 모두 팔백 원이었다. 군산 역 앞에는 찐빵집이 쭉 하니 있었는데 거기 가면 옥수수를 쪄 주었다. 옥수수 쪄 주는 삯은 옥수수 다섯 개였다. 삶은 옥수수 백 개를 다 팔면 천 원을 만들 수가 있었다. 팔백 원주고 사서 천 원을 만들었으니 이백 원이 남았다. 그때는 쌀 한 되(약 2리터)에 80원이었으니 옥수수 백 개를 팔면 쌀 두 되 값 정도를 번 셈이다. 그렇게 옥수수 장사를 시작해서 하루에 옥수수 네 접도 팔고 다섯 접도 팔았다. 또 고구마도 쪄서 팔아서 여름내 돈을 모았다.     


감 장사

     

옥수수가 나오는 철이 지나 또 무슨 장사를 해 볼까 생각을 하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가을이라 감이 참 쌌다.

“언니, 감은 어디서 사야 돼?”

“감은 감독에 많이 있지.”

“감독이 어디야?”

“감독은 군산역전 근처에 색시 장사하는 골목이야. 색시들이 낮에 실컷 자고 저녁에만 나오니까 거기서 촌사람들이 낮에 감 장사를 하는 거지.”

언니 말을 듣고 감독을 찾아갔더니 먹시감(*감 표면에 검은색 먹물이 들어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대봉보다 크기는 작지만 홍시보다 달고 맛있다)이 제일 많고 맛이 좋아 인기가 있었다. 


  감독에서 먹시 감을 몽땅 사서 아기는 업고, 감을 머리에 이고 유가꼬 시장에서 팔았다. 하루는 먹시 감을 열 접(한 접은 100개) 사서 한 대야가 넘길래 한복 치마를 뜯어서 대야에 둘러 묶어가지고 머리에 이고 오는데 갑자기 목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아기도 업고 머리에 너무 많이이고 와서 그런지 목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목이 그렇게 된 뒤로는 임질을 할 수 없어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장사를 해야 먹고 살 텐데 어떻게 장사를 하지?’

생각하다 하다 언니와 상의했다.

“언니, 내가 임질을 못해서 장사를 못하는데 어떡하지?”

“임질을 못 할 정도면 병원에 가야지 왜 여태 말도 안 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어?”

언니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다.

“아니,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야. 그건 그렇고 장사를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럼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하면 되잖아.”

왜 그때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무릎을 쳤다. 그 길로 바로 리어카를 사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리어카에는 물건도 많이 실을 수 있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팔기에도 좋았다. 대야에다 이고 다닐 때는 많이 담아야 옥수수 이백 개 정도밖에 못 담았는데 리어카에는 이것저것 많이 담아서 싣고 다닐 수 있었다. 리어카를 끌면서 장사한 후로는 물건 종류가 많으니 전보다 물건도 더 잘 팔렸다. 돈도 많이 벌고 목이 아프지 않아서 좋았다.                                            


돼지고기 장사     


  겨울이 돼서 감도 안 나왔다. 언니네 집에 세 들어 사는 학생이 있었는데 학생네 집은 군산 개정이었다. 개정 학생네 엄마는 가끔 주말에 반찬을 해 가지고 아들을 보러 왔다. 겨울이라 할 일이 없어 노는 김에 아주머니 따라 개정에 놀러 갔다. 가서 보니 그 집은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이라 머슴도 있집도 넓었다. 집 한 구석에는 돼지도 먹이고 있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돼지 한 마리가 밥도 안 먹고 시들부들  했다.

“내가 돼지 싸게 줄 테니 잡아서 한번 팔아볼래요?”

아주머니가 나에게 돼지를 사라고 권했다. 


  그날 돼지를 잡아 내장이랑 발은 버리고 고기만 택시에 싣고 언니네 집으로 왔다. 돼지비계를 싹 발라 큰 솥에다 넣고 삶았더니 기름이 쪽 빠졌다. 삶은 돼지 껍질은 야들야들하니 맛이 좋았다. 그걸 조카들도 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소금과 함께 문 밖에 내놓았다. 언니네 집은 사람들 다니는 길 가 집이었다. 삶은 돼지 껍질로 사람을 모아 놓고 돼지고기는 대문 밖에 늘어놓고 팔았다. 거기서 다 못 판 고기는 대야에 넣어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 다니며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한 네다섯 마리쯤 돼지를 잡아다가 겨울에도 돈을 벌었다. 언니는 돼지기름으로 밀가루 반죽을 튀기기도 하고 지짐도 하면서 겨우내 맛있는 음식을 해 주었다.   

   

언니가 살던 옛 집이 폐가가 되었다(2017)


과일장사 길로 들어서다     


  봄이 돼서 다시 장사를 하려고 생각해보니 과일 같은 것을 사다 팔면 좋을 것 같았다.

“언니, 과일은 어디서 사다 팔아야 해?”

“과일은 축동 청과시장에서 경매하는데 거기서 사다 팔면 돼. 옆집 아줌마가 과일 장사한다고 하니 내가 소개해 줄게.”

언니는 나를 옆집 과일 장사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데리고 갔다.

“얘가 제 동생인데 과일 장사를 하고 싶다고 하니 시장가실 때 동생한테 물건 좀 사 주세요.”

소개를 받고 처음에는 아주머니와 함께 청과시장에 가서 물건 사주면 그것을 그대로 팔았다. 몇 번 과일을 사다 팔아보니 점차 중매인도 알게 되고 아주머니를 거치지 않아도 중매인에게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직접 물건을 사서 파니까 돈도 더 많이 남고 장사에 재미가 붙었다. 아침 먹고 나와 과일, 야채 등 한 리어카 팔고서 집에 들어가 둘째에게 젖을 주었다.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부엌에 들어가니 언니가 형부랑 조카들 먹으라고 밥을 한 솥 해 놓았는데 내가 먹다 보니 그 많은 밥을 다 먹어 버렸다.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밥을 한꺼번에 다 먹었는지 모르겠다.  


이전 08화 47년생 엄마 #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