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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Sep 29. 2021

47년생 엄마 #11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5장 군산에서 다시 시작(24~35세)     


새 집 잔금     


  내 나이 스물여섯에 셋째 딸을 낳았다. 이제 아이들이 많아지니 오만 원짜리 전세방 한 칸은 너무 좁았다. 이사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데 창성동 꼭대기에서 색시 장사하는 아가씨들한테 옥수수 팔던 생각이 났다. 군산역 앞에서 옥수수를 팔다가 남는 게 있으면 창성동으로 갔다. 거기 있는 아가씨들은 돈이 없어 옥수수를 못 사 먹고 손님들이 아가씨들한테 옥수수를 사 주었다. 그래도 팔다가 남은 것이 있으면 공짜로 아가씨들한테 나눠줬다. 내가 이렇게 선심을 쓰면 다음에 아가씨들이 손님한테 졸라서 옥수수를 비싸게 팔아줬다. 그런데 어느 날 애기 업고 남은 옥수수를 팔러 창성동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집이 거의 비어 있었다.

“아저씨, 여기 집들이 왜 다 비어 있어요?”

집 근처에 있는 담배 가게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은 거기서 색시 장사하던 사람들이 군산 극장 뒷골목으로 다 내려가서 그래. 집이 많이 나와서 싸게 판다나 봐.”


  그때 담배 가게 아저씨 말이 생각나 창성동으로 가 보았다. 아직도 비어있는 집이 많았는데 그중 최고 큰 집이 맘에 들었다. 집을 사려고 소개하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봤더니 70만 원만 주면 산다고 했다.  얼른 언니를 찾아가 상의했다.

“언니, 창성동 꼭대기 색시 장사하는 집들이 많이 비어 있는데 그 집 중에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 있어. 그 집을 꼭 샀으면 좋겠는데 돈이 많이 모자라.”

“그 집을 사면 세만 놔도 밥은 먹고살겠네. 어떻게 해서든 꼭 사봐.”

언니가 권하기도 하고 그 집이 꼭 사고 싶기도 해서 가진 돈을 다 모아보았으나 70만 원의 반도 안됐다. 명절 대목 장사를  해서 좀 더 돈을 마련한 다음 집주인을 찾아갔다.

“아주머니, 제가 집을 살게요. 지금은 계약금 십만 원만 걸고 잔금은 몇 달 뒤에 치러도 될까요?”

집주인도 어차피 비어 있는 집이니 흔쾌히 매매계약을 하자고 했다. 이사는 잔금을 치른 뒤에 하기로 했다.


  이후에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벌고 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돈 3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30만 원을 어디에 쓰시게요?”

“마늘 밭을 사서 마늘을 뽑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대”

“내가 돈이 어디 있어서 빌려줘요.”

“집 살 돈 있잖아. 내가 빌려주면 꼭 배는 벌어서 줄게.”

남편이 하도 졸라대서 할 수 없이 30만 원을 빌려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늘은 이파리째 먹는 풋마늘이었다. 겨울에 뽑아 파는 풋마늘이라 하우스 안에서 키운 거였다. 청과시장 중매인 29번이 남편에게 합자해서 하자고 했는데 그 사람은 돈 한 푼 내지 않고 남편 돈으로만 마늘밭을 샀다고 했다. 어찌 됐건 마늘 밭을 샀으니 마늘을 뽑아서 한차를 팔았는데 돈을 갖고 오지 않았다.

“집값 잔금 내야 하는데 마늘 판 돈은 왜 안 갖다 줘요?”

“29번 각시가 아기를 낳았는데 쌀팔아 밥 해줘야 한다면서 다 가지고 갔어.”

잔금 치를 날짜는 다가오는데 그 뒤로 남편은 마늘을 팔러 가지 않았다.

“왜 마늘을 안 팔아요?”

“마늘이 너무 어려서 좀 더 크면 팔 수 있대.”


  집 잔금 치를 날짜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남편 말만 믿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 장사를 하루 쉬고 마늘 밭에 가 보았다. 마늘이 겨울이라 얼어 죽어 비닐하우스 밭에 오다가다 한 줄기씩 남아있었다. 기가 막혀 한숨만 나왔다.

‘정말 가만히만 있어도 도와주는 건데. 이제 또 잔금은 무슨 돈으로 치러야 하지....’

밭에 앉아서 한참 울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라도 마늘 뽑아서 팔아 돈을 건져 봐야지.’

남아있는 마늘이라도 팔아볼 욕심에 열심히 마늘을 뽑았다. 


  그리고 아는 중매인에게 소개받아 풋마늘을 대전에 있는 개인 상회에 갖다 줬다. 대전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 상회 주인이 여인숙을 잡아주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물건 팔아서 돈을 마련해 줄게요.”

셋째 딸을 업고 가서 여인숙에서 자고 그다음 날 일어나 보니 아직 돌도 안 지난 애가 똥을 싸서 이불에다 바르고 있었다.  너무 깜짝 놀랐다.

‘이 이불을 어찌하면 좋을까? 주인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이불 값을 물어달라고 할 텐데....’

그냥 모른 체하고 가자니 양심에 걸리지만 돈 한 푼이 아쉬울 때라 이불을 똥이 잘 보이지 않게 개 놓고 여인숙을 빠져나왔다.  상회에 오니 주인이 마늘을 팔아서 돈을 주었다. 


  그 후로도 그 어린 아기를 업고 마늘 몇 차를 더 뽑아 전주, 익산, 대전까지 가서 팔았다. 그렇게 해서 건진 돈이 모두 20만 원이었다. 29번 중매인이 한 차 판 돈만 주었어도 그렇게 많이 밑지지는 않았을 텐데 끝내 돈을 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잔금이 부족한데 신랑이 그렇게 돈을 갖다 없애 버렸으니 아직도 30만 원이 부족했다. 믿는 구석은 언니밖에 없어 또 언니를 찾아가 부탁했다.

“언니, 나 집값이 30만 원 모자라. 집을 안 사면 계약금 10만 원을 떼일 것이고, 집을 사려니 이 부족해. 언니는 아는 사람이 많으니 보증 좀 서주면 안 될까? 내가 돈 버는 대로 바로 갚아 줄게. 언니가 빚보증 좀 서줘.”

“그래, 내가 알아볼게.”

언니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돈 빌릴 곳을 수소문해 주었다.

언니 친구한테 부탁해서 돈을 빌리러 언니 친구네 집에 갔다.

“동생이 이 돈 못 갚으면 언니가 갚아주어야 해. 이자는 오부야.”

그렇게 30만 원을 빌리고 내가 모은 돈 40만 원을 갖고 겨우 내 첫 집을 샀다.      


지붕 수리     


  새 집에 이사를 가서 보니 초가집인데 지붕을 몇 년 동안 새로 이지 않아 비가 철철 샜다. 세라도 받아야 빌린 돈 이자라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수리를 했다. 남편이랑 대충 도배를 해서 방 한 칸에 월세 천 원씩 받고 세를 내놨다. 우리 집은 원래 색시 장사하던 곳이라 방에  창문도 없었다. 조그마한 방이 다해서 열다섯 개였다. 그 시절은 방이 없어 그런 방에 세를 놔도 방이 잘 나갔다. 지붕에 비만 새지 않으면 아무 걱정이 없겠는데 비만 오면 방으로 물이 새니 그게 걱정이었다. 지붕 수리할 돈은 없고 땅 꺼지게 걱정만 하고 있는데 하루는 언니가 동사무소에 가 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한다면서 비 새는 집 고치라고 슬레이트를 공짜로 준대.”

언니 말을 듣고 동사무소에 가서 슬레이트를 좀 달라고 했다.

“여기에는 슬레이트가 없어요. 지금 새마을 운동하는 마을에서 헌 집을 뜯고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슬레이트를 갖다가 쓰세요. 동사무소에서 보냈다고 말하면 돼요.”

동사무소 직원 말을 듣고 그날부터 우리 내외는 헌 집 뜯는 곳마다 다니면서 헌 슬레이트를 가져다 지붕을 덮었다. 남편이 노가다 일을 해 봤으니 좀 더 일이 수월했다. 그 당시는 차도 없어서 리어카에 슬레이트를 담아 창성동 꼭대기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골수암     


  이럭저럭 집을 고치고 나니 이제는 집 살 때 빌린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달이 이자가 많이 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아기들도 잘 돌보지 않고 장사하는 데만 신경 써서 그런지 어느 날 장사 끝내고 집에 와 보니 둘째 아이가 열이 펄펄 났다.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다가 아기가 열날 때마다 해열제를 먹였는데 해열제를 먹이면 아이가 열이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올랐다. 며칠 동안 해열제만 먹였는데 그 열이 아이 몸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이가 다 죽게 되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동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홍역이라고 했다.  

“아이가 이렇게 다 죽어 가도록 병원에 데려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 엄마 맞아요?”

의사가 혼내는 데도 할 말이 없었다. 아이가 아픈데도 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언니한테 애기 좀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장사를 하러 나갔다. 그때는 집이 있어도 집세로는 이자 줄 돈도 모자라 셋째 딸을 업고 하루도 벌지 않으면 우리 식구는 굶을 수밖에 없었다. 


  장사를 하고 집에 왔는데도 둘째 아이가 계속 열이 오르고 아팠다. 다시 아이를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둘째 아이 나이가 네 살이었다. 군산 와서 장사할 때 둘째 아이는 노상 업고 다녔다. 아이를 업으면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야 하는데 내가 리어카를 밀고 다녀야 하니 늘 포대기를 꼭 묶었다. 그래야 업은 아이가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다리도 벌어지고 걸음도 아구작 아구작 걷는 게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었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는 열이 다리에 자리 잡아 벌겋게 되어 아예 걸음을 걷지 못했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군산에서 제일 큰 병원인 개정병원에  갔다.

“골수암입니다.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골수암이란 말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하느님, 골수암이라니요.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는 무엇이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네요.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느님을 원망했다. 아이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다리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조금 아물면 다시 속으로 곪아 터지고 조금 아물면 또 터지고 해서 자꾸 재수술을 해야 했다. 신랑이 병원을 짓는 곳에서 노가다를 하고 있었는데 원장 의사가 우리 사정을 아시고 두세 번 공짜로 다리 수술을 해 주었다. 공짜로 한 수술까지 하면 다리 수술을 총 열두 번은 받은 것 같다.

 

“암 줄기가 온몸에 퍼지기 전에 오른쪽 다리를 잘라야 아이가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수술을 하고 나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계속 수술을 해도 다리에 암 줄기가 남아있어 재발된다고 했다. 네 살 밖에 안 된 아이 한쪽 다리를 잘라야 한다니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했다.

‘하느님, 내가 애기도 없을 때 죽으려고 했는데 그때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 놓고 이 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네요. 저를 살려주셨으면 우리 아이 다리도 잘라내지 않게 도와주세요.’

개정 병원에서 수술을 여러 번 하다 보니 다시 빚만 많이 지고 둘째 아이도 아프니 정말 세상 살기 싫었다. 그런데 죽을래도 딸이 셋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내가 세상에 없으면 우리 딸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 차려야지. 안간힘을 내서 다시 살아보자. 우리 하느님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겠지....’


  용기를 내어 리어카에 물건을 잔뜩 싣고 다니면서 물건 사러 오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우리 딸 살리는 방법이 없겠냐고, 우리 딸 병 고치는 사람 알면 좀 알려달라고 딸 병 자랑을 했다. 며칠쯤 지나 같은 성당을 다니는 춘엽이 엄마를 만났다. 춘엽이 엄마에게도 또 딸 병 자랑을 했다.

“애기 엄마 사정이 너무 딱하네.... 내가 치질 잘 빼는 할머니를 아는 데 혹시 모르니 거기 한번 데려가 봐요.”


  그 할머니는 군산에서 치질 빼는 걸로 유명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사는 곳은 명산 시장 근처 산동네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기를 업고 치질 빼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할머니에게 아이 다리를 보이며 아이 병에 대해 설명했다.

“아기 다리를 고칠 수 있을까요?”

“치료를 해 봐야지, 해 보지도 않고 장담할 순 없지.”

할머니에게 바짝 매달려 제발 아이 다리 좀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마취도 안 시키고 촛불로 빨갛게 부어오른 다리를 지졌다. 애기가 새파랗게 질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생살을 촛불로 지지니 얼마나 아프면 저렇게 숨이 넘어갈까.... 부모 못 만나 어린것이 저런 고생을 하는구나....’

아이 모습을 지켜보는데 눈물이 마구 흘렀다. 할머니는 촛불로 다리를 지지더니 그 지진 자리에 독한 치질 빼는 가루약을 뿌렸다.

“이틀에 한 번씩 와봐. 아기 집에 데리고 가서 진통제도 사 먹이고 개 대가리를 사다가 폭신 과서 물만 먹여.”

집에 와서 할머니가 시킨 대로 개 대가리를 푹 고아서 안 먹겠다는 걸 매일 반 그릇씩 강제로 먹였다. 그 뒤로도 다섯 번이나 더 가서 그 독한 치료를 받았다. 여섯 번째 치료를 받으러 가서 아이 다리에 묶어 놓은 붕대를 푸는데 아이 다리 속에서 딱딱한 뼈 같은 게 한 네 개쯤 빠져나왔다. 깜짝 놀라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그 뼈가 뭐예요?”

“밑 뼈야. 암 줄기지. 이제 암 줄기가 다 빠져나왔으니 다 되었네.”


  그렇게 암 줄기가 빠진 뒤로 치질 빼는 할머니 집에 치료를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래도 저절로 상처가 아물고 다시는 도지지도 않고 잘 나았다. 다리 치료하려고 그렇게 안달복달 애를 많이 썼는데 정작 나을 때는 돈도 얼마 안 들이고 쉽게 고쳤다. 할머니한테는 치료비도 얼마 안 준 것 같다. 지금이라도 살아계시면 내가 옷이라도 한 벌 해 드리고 싶은데 당시도 할머니셨으니 지금은 벌써 돌아가셨을 것이다. 사는 동안 그 할머니 한번 안 찾아뵌 것이 정말 죄송스럽다.  할머니를 소개해준 춘엽이 엄마는 아직 살아있다. 가끔 길 가다 만나면 세월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나한테 내 딸 안부를 묻는다.

“자네 둘째 딸 지금은 괜찮아?”

“그럼 벌써 나아서 아기 낳고 잘 살고 있지.”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아이가 다 낫고 계산을 해보니 아이 병원비로 꼭 집 한 채 값을 썼다. 집 살 때 얻은 빚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청과물을 외상으로 갖다 팔고 병원비로 다 써버렸더니 더 빚이 많아졌다. 빚이 많아도 아이 다리를 끊어내지 않고 잘 고쳤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둘째 다리에 흉터가 남아있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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