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Sep 30. 2021

47년생 엄마 #13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5장 군산에서 다시 시작(24~35세)     


술 좋아하는 남편    

 

  남편은 술을 좋아해서 무슨 일만 시키면 술부터 마시고 보는 사람이다.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식구들은 안중에도 없고 그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남편과 나는 아침에 청과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물건을 내 자리로 옮겨 놓고 나면 나는 과일을 팔고 남편은 아이들을 보러 갔다. 우리 집은 방이 열다섯 개라 별별 사람들이 다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남편애기 본다면서 집에 와 놓고 셋방 사람들하고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가보면 남편은 네 날개 활짝 펼치고 자고 있었다. 그 옆에 막내딸은  배가 고파 하도 울어서 눈가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채로 자고 있었다.

‘어린것이 부모 못 만나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그런 딸을 볼 때 너무 속상하고 불쌍해서 아기를 안고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죽으나 사나 애기를 업고 장사를 했다. 장사를 할 때 애기를 업고 리어카를 끌려면 너무 힘이 들었다. 남편은 집에서 편하게 술이나 마시고 놀고 있는데 나 혼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하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다 남편이 자기 일을 해야 술도 덜먹으니 땅을 사서 농사 지을 수 있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집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 어때요?”

“땅을 사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사지.”

“장사해서 돈을 모으면 되잖아요. 앞으로 내가 장사하는 동안 애들 좀 잘 봐주세요.”

남편에게 신신부탁을 하고 돈이 좀 모이면 바로 땅을 사기로 했다.


고달픈 하루 일과     


  장사를 끝내고 집에 가면 세탁기도 없을 때라 남편과 네 명 아이들 옷, 막내 기저귀 빨래까지 다 해야 했다. 빨래가 모두 끝나면 밤 열두 시가 됐다.

그게 끝나면 또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에 연탄을 땠을 때라 셋방 열다섯 칸에서 나온 연탄재가 하루에 두 개씩 쳐도 모두 삼십 개였다. 우리 집은 달동네라 연탄재를 청소 리어카가 다니는 아래쪽 골목까지 내려다 놔야 했다. 연탄재는 아무 때나 내려다 놓으면 안 되고 새벽 2시~4시 사이에 내려다 놓아야 청소하는 사람들이 와서 싣고 갔다. 우리 집은 산꼭대기 집이라 리어카도 다니지 못해 다라이에 연탄재를 담아서 머리에 이고 아래쪽 골목에 갖다 버렸다. 삼십 장이 넘는 연탄재를 매일 갖다 버려야지 하루만 안 버리면 태산같이 연탄재가 쌓였다.

“각자 연탄재는 각자가 갖다 버려요.”

세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도 오히려 사람들이 나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런 꼭대기 집에서 연탄재까지 버리면서 사느니 차라리 이사를 가고 말지요.”

사실 그 사람들이 연탄재를 버리려면 새벽 2~3시에 일어나 버려야 하니 이렇게 배짱을 부릴 만도 했다. 누구 하나 그 시간에 연탄재를 버리는 사람은 없고 그렇다고 남편이 거들어 주지 않았다.  그 많은 연탄재를 다 갖다 버리고 쓰레기까지 다 치우고 나면 보통 새벽 3시가 되었다.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밥을 해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다. 아침 8시까지 청과 시장에 가야 하는데 아이들은 입에 밥을 하나 가득 물고 당최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았다. 강제로 애들 입에 밥을 떠 넣고 막내를 업고 청과시장에 서둘러 갔다.  하루에 세 리어카 정도 물건을 팔고 집에 왔다. 아이들 먹으라고 전기밥솥에 밥을 한 솥 해 놓고 나오는데 집에 가보면 밥이 하나도 없다. 그런 많은 밥을 먹으려면 반찬도 만만치 않았다. 제일 싼 콩나물을 사다가 물 한 솥 부어 콩나물국을 끓여 놓으면 아이들은 거기에 밥을 말아 김치 얹어 밥을 먹었다. 그때는 비싼 고기는 생전 사주지도 않고 싸디 싼 나물 반찬만 해서 먹고살았다.      


아들   

  

  세월이 흘러 또 아기가 생겼다. 임신 칠 개월쯤 되어 장사하는데 하혈을 했다. 병원에 갔더니 아기를 잘 낳으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다. 내가  누워 있어야 하니 남편더러 장사를 좀 해 보라고 했다. 남편이 장사하고 집에 왔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집에 왔다.

“왜 맨발로 왔어요?”

“고구마 한 리어카 싣고 팔러 갔는데 어떤 여자가 고생한다면서 소주 한잔을 주더라고. 근데 그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어버렸어. 좀 있다가 깨보니 그 여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내잖아.  왜 돈을 꺼내냐고 했더니 돈을 꺼내는 게 아니고 내 돈이 땅바닥에 흘러서 주워 넣어 주는 거래. 내가 도둑이라고 그랬더니 자기는 도와주려고 한 거지 절대로 도둑질한 게 아니라고 우기더라고. 리어카를 보니 고구마도 누가 다 가져가고 신발도 없어졌어. 그래서 신고하러 파출소까지 갔다 왔지.”

남편은 거지꼴을 하고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런 사람한테 돈을 벌어오라고 한 나 자신이 더 한심했다.

 

  또 하루는 남편이 수박 장사하러 색시 골목에 갔다. 거기서 수박 한 덩어리하고 술 하고 바꿔 먹고는 술에 취해서 수박도 다 잊어버리고 술만 잔뜩 취해서 집에 왔다.

나는 장사할 때 물건 파느라 점심 먹을 시간도 없는데 신랑은 물건만 팔러 나가면 술 마시고 손해만 보니 아무 일도 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이 있어서 아기 낳을 때까지 집세라도 받아 겨우 밥은 먹고살았다.

3개월이 지나 아기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아들을 낳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기 낳고 며칠 쉬고  또 장사하러 나갔다. 아기가 너무 어려 술 먹지 말고 아기 잘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도 남편이 못 미더워 물건을 조금만 사서 팔고 일찍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나운동 땅을 팔다    

 

  아들을 낳고 얼마 안 있다가 어머니가 아들 낳아서 축하한다며 우리 집에 오셨다. 그런데 축하는 둘째 일이고 우선 나에게 다른 볼 일이 있으셨다.

“지금 사는 땅은 팔고 이사를 해야지 거기서 살면 누가 그런 시골에 시집을 오겠냐. 아들 장가보내려면 평지에다 땅을 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 복덕방에서 땅을 천만 원에 팔아준다는데 어떻게 할까?”

어머니가 산 집과 밭은 5년 전에 땅값만 550만 원에 이전비, 밭에 부은 모래 비까지 전부 700만 원이 들었던 땅이었다.

“어머니, 그 땅은 형부가 사주셨으니 형부가 잘 알 거예요. 제가 형부한테 물어봐서 알려드릴게요.”

어머니는 언니 시집갈 때 뭐 해 준 것도 없고, 내가 집 나왔을 때도 나를 언니네 집으로 보내버려서 직접 형부를 만나 상의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저녁에 언니네 집에 가서 형부와 상의했다.

“형부, 어머니가 집하고 밭을 천만 원에 판다는데 그렇게 팔아도 될까요?”

“천만 원이면 너무 싼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더 받을 수 있으니 좀 기다리시라고 해.”


  다음날 어머니에게 형부 의견을 전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큰 동생이 버럭 화를 냈다.

“천만 원 준다면 얼른 팔아야지. 뭘 더 기다려요. 천만 원보다 더 받는 것은 매형이 다 가지라고 해요.”

큰 동생이 자꾸 어머니에게 얼른 땅을 팔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로 형부가 여기저기 알아봐서 그 땅을 천이백만 원에 팔아주었다. 그러면 약속한 대로 이백만 원은 형부를 줘야 하는데 돈을 주기는커녕 돈을 꾸러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땅 판 돈으로 수송동에 논 1200평짜리 두 배미를 사고 미장동과 가까운 경장동에 집을 샀다. 


  그 뒤 형부를 만났는데 형부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었다.

“처제, 장모는 정말 너무한 것 아니야? 나한테 돈을 주기는커녕 나더러 집 사고 땅 사느라 돈이 부족하니 돈을 꿔달래.”

“그래서 돈 드렸어요?”

“아니, 아버님 땅 팔아서 해결했다는데....”

“아버지는 땅이 없는데....”

의붓아버지가 땅이 없는데 팔았다는 소리에 궁금해서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보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땅을 팔았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이번에 둘째가 사법시험을 일차까지 합격했는데 2차에 떨어졌어. 둘째 신원조회를 해보니 부모가 이북사람이라서 떨어졌대. 내가 재가하고 호적 만들 때 나랑 신랑이랑 이북사람으로 만들었거든. 그게 이렇게 자손한테 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래서 이번에 호적 정리를 했어. 호적 정리를 하다 보니까 네 새아버지 고향이 제주도여서 호적 만들러 제주도에 찾아갔지. 그런데 한 친척이 아들이 없다고 제사를 못 모신다고 그러면서 새아버지를 자기네 집에 양자로 들어와 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야. 새아버지가 양자 가는 대가로 문중 땅을 받았는데 그걸 팔아서 모자란 돈을 해결 한 거지.”

의붓아버지가 일본 강점기 때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는 말은 들었는데 고향이 제주도인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판 나운동 땅은 일이 년쯤 뒤에 개발을 시작하더니 군산에서 처음으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이전 12화 47년생 엄마 #1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