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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01. 2021

47년생 엄마 #14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5장 군산에서 다시 시작(24~35세)     


큰 동생도 청과물 장사 길로 들어서다


  어머니는 수송동으로 이사 와서 논 한 배미는 정구지 농사를, 다른 한 배미는 쌀농사를 지었다. 큰 동생은 예쁜 여자랑 결혼한 후 한동안 부모님 모시고 잘 살더니 어머니랑 싸워서 분가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사정했다. 

“네 큰 동생이 치질에 걸려 자전거를 탈 수 없대. 정구지를 청과물 시장에 팔러 가야 하는데 그걸 김서방이 좀 해주면 안 될까?”

큰 동생이 정말 치질에 걸려 그런지도 모르지만 내 눈치에 동생은 더 이상 농사를 짓고 싶지 않은데 어머니가 계속하라고 하니 집을 나간 것 같았다. 


  어머니 고집에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친정 정구지 좀 팔아 주라고 했다.

“처남도 안 파는 정구지를 내가 왜 팔아야 해?”

남편처갓집에서 삼 년간 머슴살이한 것이 생각나는지 화를 냈다. 남편에겐 어머니  일에 관해 더 이상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 뒤로 내가 물건을 조금만 사서 팔고 어머니가 농사지은 정구지를 가져다 팔았다. 그런데 정구지를 집까지 실어 오는 것이 일이었다. 청과 시장이 우리 집에서 더 가까우니 저녁에 리어카로 우리 집 아래쪽 길목까지만 가져오고 우리 집까지는 대야에 정구지를 담아 머리에 이고 실어 날랐다. 그리고 새벽에 다시 정구지를 머리에 이어 나르고 리어카에 실어 청과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침엔 아이들 밥 먹여서 학교도 보내야 하고 집도 대충 치워 놓고 해야 하는데 어머니 정구지장사까지 하려니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 정구지 밭은 없애버리고 편히 사세요. 동생도 안 해 준다는데 무슨 수로 농사를 지어요. 어머니 나이도 이제 칠십이예요.”

의붓아버지 나이는 어머니와 12살 차이가 나서 팔십이 넘었다.

“둘째가 대학 마치고 취직할 때까지는 농사일을 해야 비도 주고 생활비도 줄 거 아니야. 큰애를 불러다 타일어도 보고 화도 내 보고 할 만큼 했는데 내 말을 듣지 않아. 그러고는 논 두 배미 중에 한 배미는 자기 몫이니 팔아서 돈을 달래. 자기가 슈퍼를 차리든지 개인택시를 하던지 한다고. 이를 어쩌면 좋냐.”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잡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우선 땅 파는 것은 막아보려고 큰 동생을 청과물 시장으로 불렀다.

“너 나랑 청과물 시장에서 장사 좀 해보자. 너는 고등학교까지 나와 계산속도 빠르니 중매인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네가 중매인이 되면 내가 너한테 물건을 사서 팔아줄게. 내일 아침에 약관(청과물시장의 옛말)에 나와 장사하는 것을 배워봐”

지금은 청과물 시장이 미장동 쪽에 있지만 그때는 군산 중앙로 둔율동에 청과물 시장이 크게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약관에 가보니 큰 동생이 나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큰 동생과 어떤 물건이 나왔다 구경을 죽 했다. 당시는 과일을 박스에 담지 않고 검은 바구니에 사과를 백 개씩 담아 가지고 오면 시장 마당에 천막을 깔고 굵은 것 잔 것 골라 다시 쌓아 놓고 경매를 했다. 


  그날은 사과가 많이 나왔다. 구석에 있는 사과가 싸게 나가 길래 얼른 한 차를 사서 동생 보고 큰 것은 얼마, 작은 것은 얼마를 주고 팔라고 알려주었다. 동생은 청과 시장에서 사과를 팔고 나는 리어카에 이것저것 몽땅 싣고 군산 시내에서 팔았다. 내가 한 리어카를 다 팔고 왔더니 큰 동생이 사과 판 돈이라고 하면서 주었는데 그 돈이 사과 값 본전이었다. 본전이 떨어졌는데도 사과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이 돈이 본전이니까 남은 사과는 팔아서 너 다 가져라.”

그 많은 사과를 큰 동생에게 다 주었다. 


  그 뒤로 동생은 내가 물건을 안 사줘도 물건을 직접 사서 한 리어카를 팔아왔다. 나는 여러 장사를 하다 고생 끝에 대야 장사부터 시작해서 리어카 끌며 청과물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약관도 몰라 언니에게 물어봐서 찾아갔고, 중매인한테 물건 사다가 돈도 안 남는 장사를 몇 년간 하면서 장사를 배웠다. 그런데 동생은 누나가 있어 금방 청과물 장사에 도가 텄다. 중매인들도 내가 누나인지 아니까 큰 동생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얼마든지 줬다. 장사를 시작한 뒤로 큰 동생은 나보다 더 장사를 잘해서 더 이상 어머니한테 땅 팔아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수송동 집터를 사다    

 

  이제 큰 동생은 잘 사니까 잊어버리고 사는데 둘째 동생이 문제다. 큰 동생이 분가할 때 어머니 수중에 400만 원이 있었다. 어머니는 성당을 다니면서 신여사라는 건축업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어머니를 자꾸 꼬이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자매님, 나한테 돈 빌려주면 오 부 이자로 쳐 주고 내가 돈 잘 굴려 돈 벌게 해 줄 테니 나한테 돈을 맡겨요.”

이때가 둘째 동생이 아직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어머니는 둘째 동생 등록금과 생활비가 필요하니 다달이 이자로 동생 생활비를 주려고 신여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돈을 빌려간 후로 세 번 정도 이자를 넣어주고는 이자도 안 주고 원금도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어머니는 또 나를 찾아오셔서 고민을 털어놨다.

“태복아, 네 둘째 동생이 일 년은 더 학교 다녀야 졸업하고 다달이 20만 원씩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데 신여사에게 돈을 빌려줬더니 이자는커녕 원금도 안 주니 어쩌면 좋냐. 누구한테 돈 빌릴 데도 없고 너한테 밖에 말할 곳이 없구나.”

어머니는 둘째 동생 공부시키게 나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도 생각해보다가 남편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를 했다.

“수송동에 350만 원 주고 산 논이 지금은 대지로 변경되었대. 그중에 100평 정도 따로 떨어져 있는데 우리 집 짓게 그 땅을 달라고 하고 생활비를 부쳐줘.”

남편이 한 말을 어머니에게 전하고 생활비를 부쳐 줄 테니 땅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 술 더 떴다.

“거기가 지금 땅 값이 올라 평당 오만 원씩 잡고 100평이니 500만 원에 너에게 팔게.”

“지금은 당장 500만 원이 없으니 한 달에 20만 원씩 동생에게 부쳐 주고 나머지는 일 년 후에 갚을게요.”

이렇게 수송동 집 터를 어머니에게 샀다.    

  

새만금 내초도 땅을 사다     


  장사를 해서 돈이 조금 모아졌는데 아직도 논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술 좋아하는 남편에게 농사라도 짓게 하려면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초도 개간지를 정부가 상이군인들에게 농사지어 먹고살라고 배당해주었는데 그 사람들이 도로 싸게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초도는 지금은 새만금 땅으로 들어가 엄청 비싸졌지그때는 군산에서 최고 싼 개간지였다. 나는 시간을 내어 땅 사러 내초도에 갔다. 넓은 들에 농사짓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붙잡고 땅 판다는 집을 물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땅 주인이랑 아는 사람이라 땅 주인 주소를 알려주었다. 

“땅 판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땅에 간기(소금기)가 있습니다. 한 해 농사를 지어보니 농사도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한테 싸게 파세요.”

“저도 상이군인에게 돈 얹어주고 샀으니 그 돈은 부치고 팔아야지요.”

이 사람이 상이군인, 그러니까 국가 유공자인 줄만 알았는데 이 사람도 그 사람들에게 땅을 산 사람이었다.

“이 땅은 앞으로 십 년간은 일 년에 쌀 열 가마니씩 정부에다 갚아야 해요. 등기는 십 년 후에 됩니다. 그리고 권리금이 오백만 원인데 사려면 사요.”

그때 쌀 열 가마니면 약 이십만 원 정도 할 때다. 십 년이니까 이백만 원에 권리금 오백만 원해서 총 천이백 평 논 두 배미가 칠백만 원정도 되었다. 당장 큰돈은 없지만 차차 갚아 나가면 되니까 그 땅을 사기로 했다.

 

  땅 사고 첫해 농사를 지었는데 그 넓은 들에서 농사가 최고 잘 되었다. 농사지어 쌀 판 돈에 조금 돈을 더 보태어 수송동 집 터 잔금 이백사십만 원을 갚았다. 십삼 개월 동안 동생에게 이십만 원씩 부쳐 주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수송동 집 터 잔금은 오백만 원에서 동생 생활비를 뺀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준 돈으로 둘째 동생 장가보낼 때 쓴다고 모아두었다.      


사과밭 손해

    

  그해 추수하고 추석이라 남편이 의성 큰집에 제사 지내러 갔다. 그런데 남편은 큰집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과밭을 외상으로 샀다. 그 해 가을과 겨울 내내 그 사과를 갖다가 파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는데 사과를 따서 저장창고에 넣지도 않고 그냥 헛간에 보관해 사과를 팔려고 보니 사과가 얼어 제 값도 받지 못했다. 그때 한 이백만 원 정도 손해를 보았다. 너무 속상해서 한바탕 싫은 소리를 쏟아냈다.

“추석이나 지내고 오지 왜 시키지도 않은 사과 장사는 한다며 이렇게 고생시켜요? 내 장사도 못하게 하고 그 고생을 하고도 이백만 원이나 빚이 졌으니 이 빚을 누가 갚아요? 당신하고 도저히 살 수 없으니 집을 나가요.”

남편은 내가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나는 이백만 원 빚을 어떻게 갚을까 나가도 걱정, 집에 와도 걱정인데 남편은 천하태평이었다. 나는 돈만 벌었지 십 원 한 장 나를 위해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그 많은 돈을 자기가 쓴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갖다 버린 것이다. 그런 남편눈앞에 보이는 것도 싫었다.

“당신 정말 꼴도 보기 싫으니 내 눈앞에 보이지도 마요.”

내가 이렇게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추석에 형이 꼭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 백만 원 빌려줬어. 내년에 형이 사과 농사지으면 돈 갚아 준대. 일 년만 고생하면 백만 원은 갖다 준다니 좀 기다려봐.”

당장 큰집에 전화를 걸어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진짜 아주버님이 돈을 빌렸다고 해서 그냥 참고 넘어갔다. 그것까지 거짓말이었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참에 이혼하려고 했다.  


서울대에 합격한 조카     


  그 뒤 일 년이 지나 가을이 되니 남편이 진짜 큰집에서 농사지은 사과를 다 갖고 왔다. 그 사과를 경매에 붙여 받은 돈이 80만 원이었다. 그 돈으로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큰집 조카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숙모요, 나 서울대학교에 붙었어요.”

‘그 산골짜기 촌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했으면 서울대학에 붙었을까....’

조카가 나한테 인사를 하는데 너무 대견스러웠다.

“서울대학교는 붙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조카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과연 그럴 것도 같았다.

‘큰집에서 일 년 농사지은 사과를 작은 집에서 다 갖고 왔으니 무엇으로 먹고살며 무슨 돈으로 아들 대학을 보낼까.... 아무래도 사과 판 돈은 도로 조카에게 줘서 보내야겠다.’

사과 판 돈 팔십만 원을 조카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 돈 갖고 가서 대학 등록금도 내고, 서울에서 집도 얻고 해서 서울대학교에 꼭 다녀.”


  그때는 서울대학교 등록금이 이십만 원 정도였고 집세도 별로 비싸지 않을 때라 돈 팔십만 원이면 조카가 등록금 내고 집을 얻고도 돈이 많이 남아 큰 고생하지 않고 대학에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고 내가 어릴 적 공부하고 싶어도 부모가 일만 시키고 학교를 안 보내 공부에 한이 맺혔다. 조카가 합격한 대학이 다른 대학도 아닌 서울대학교인데 숙모가 돼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조카에게 그 돈을 줘버리고 작년에 빚진 돈 이백만 원은 몇 년을 벌어서 갚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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