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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02. 2021

47년생 엄마 #16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6장 돈돈돈(36~41세)     


목포댁     


  하루는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하는데 어떤 여자가 방 좀 구할 수 없냐고 물었다.

“우리 집에 방이 있으니 보고 맘에 들면 이사 오세요.”

남편에게 과일을 맡기고 그 여자에게 우리 집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집을 보더니 당장 이사를 온다고 했다. 목포에서 왔다고 했다. 목포댁이 우리 집에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 둘, 아들 하나, 남편까지 온 식구가 이사를 왔다. 그 집 아이들은 우리 집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목포댁은 내가 장사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과일 장사하게 물건 좀 사줄 수 있어요?”

“내가 사줄 수는 없고 중매인을 소개해 줄 테니 중매인한테 물건 사서 팔아봐요.”

중매인을 소개해주고 중매인을 따로 불러 말했다.

목포댁을 내가 소개했으니 오늘 산 물건값은 책임지지만 내일부터는 책임지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물건 대 주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과일을 먼저 받아 팔고는 물건값도 안 주고 그냥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목포댁이 이사 오고 곧 추석이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중매인이 나를 찾아왔다.

“목포댁이 물건값을 하나도 주지 않고 그냥 집에 갔어요. 나 대신 돈 좀 받아다 줘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첫날 이후로 책임지지 않겠다고요. 물건값은 직접 가서 받으세요.”

중매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집으로 와보니 목포댁은 쌀 80kg짜리 한 가마니 들여놓고 소갈비 한 짝을 사다가 불고기를 해서 자기네 가족만 먹는 것이 아니라 셋방 열다섯 칸에 세 사는 사람들도 다 불러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일반 사람하고는 다르구나. 나는 남의 돈 안 갚으면 다 갚을 때까지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물건값은 하나도 주지 않고 집에서 잔치를 할 수 있나? 나는 집 사서 이사 왔을 때 집들이도 하지 않았는데….’

속으로만 이렇게 목포댁 욕을 했다. 


  목포댁은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통이 커서 세 사는 사람들이 좋아했다. 잔치를 벌인 다음 목포댁은 세 사는 사람들을 통해 돈 빌려주는 사람을 소개받아 돈을 빌렸다. 그 돈으로 물건값을 다 갚고 다른 중매인한테 물건을 사서  장사를 했다.

 

  그 당시 나는 딸이 넷이나 되는데 셋방이 열다섯 개라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니 이런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사놓은 집터도 있겠다, 이참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했으면 했다. 

집을 팔려고 복덕방에 놓았더니 목포댁이 냉큼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사려고 그래?”

목포댁은 나에게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집을 얼마에 팔 거야?”

“천만 원 주면 팔게.”

집 살 때는 70만 원 주고 샀지만 그새 세월이 흘러 집산지 10년째다. 세상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돈만 벌러 다녀서 집 시세도 알아보지 않고 말했는데 목포댁은 그 돈에 산다고 했다.

“그럼 내가 세 번에 나눠서 돈을 줄게. 집 지을 동안 여기서 살고 다 지어지면 이사가.”

목포댁은 우선 계약금 100만 원만 주었다. 명의 이전을 해주면 400만 원 주고 두 달 후에 나머지를 완납한다고 했다. 400만 원 받고 이전을 해주었더니 나머지 돈은 매일 오늘내일하면서 주지 않았다. 이사 갈 집은 다 지어졌는데 나머지 돈을 주지 않아 이사를 못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하다 하다 안 돼서 소송을 걸어보니 집은 벌써 청과시장 중매인한테 잡혀있었고 나에게 준 돈도 집을 잡히고 얻은 돈이었다. 집을 그냥 날리게 되어서 고민 끝에 청과시장에서 목포댁을 찾아가 매일 푼돈을 받았다. 그렇게 돈을 받다 받다 다 못 받고 결국 이사를 했다.

 

  목포댁이 청과시장에서 계를 하고 있었는데 계원들을 어떻게 꼬드겼는지 나만 빼놓고 자기네끼리만 계를 했다. 한 일 년쯤 더 군산에서 장사하다 목포댁은 곗돈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 청과시장 상인들은 나중에 엄청나게 후회했다.

“목포댁이 알고 보니 제주도에서 빚지고 목포로 갔다가 거기서도 빚을 많이 져서 군산으로 도망 온 것이래.”

처음부터 후화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다들 그 여자한테 홀려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네….”

후화(後花)는 내 둘째 딸 이름이다.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둘째 딸을 업고 다녀서 사람들이 나를 후화 엄마라고 불렀다. 둘째 딸은 나중에 동사무소 직원이 한자를 잘못 써서 이름이 바뀌었다.


남편 맹장 수술     


  새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하루는 남편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땅에 뒹굴었다. 청과 시장 가까운 병원에 급히 데려가 진찰을 받았는데 맹장염이라고 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 병원에서는 수술을 못 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맹장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라 작은 병원에서도 해주는데 남편은 뱃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수술을 못 한다고 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해 배가 남산만 하게 나왔다. 군산에서는 개정 병원이 최고 큰 병원이라 거기서 수술을 했다. 동네 병원에서 수술을 하면 수술비가 이십만 원 정도면 되는데 개정 병원은 큰 병원이라 동네 병원 수술비의 세 배가 넘었다. 수술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 뱃가죽이 워낙 두꺼워 꿰맨 자국이 아물지 않고 고름이 나와 퇴원 날짜가 자꾸 미뤄졌다. 


  수술비에 입원비까지 내려면 또 걱정이 앞서는데 남편 이복동생인 시동생까지 와서 자꾸 돈을 꿔 달라고 했다. 점심도 굶어가며 장사하고 있는데 집 지으려고 모아 놓은 돈은 자꾸 헛되게 나가고 형제들까지 자꾸 와서 돈을 달라고 괴롭혔다.

“도련님, 여기까지 오신 김에 형님이병원에 입원했으니 문병 가서 한번 보고 가세요.”

“형수님, 제가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 그러니 30만 원만 빌려주세요.”

“전에도 20만 원 빌려 가셨잖아요. 그것은 언제 갚으려고 또 돈을 내놓으라고 그러세요.”

“돈 벌면 형수님 돈 꼭 갚을게요.”

시동생이 끈질기게 볶아대서 할 수 없이 또 30만 원을 주었다.  시동생이 돌아간 얼마 뒤 남편은 비싼 병원비를 내고 퇴원을 했다. 남편은 꿰맨 자리가 터지지 않게 힘을 주면 안 돼서 한동안 힘든 일은 할 수 없었다.


  하루는 장사하고 일찍 집에 왔는데 애들 아빠가 큰 양푼에 밥을 비벼서 아이들 다섯에, 아빠까지 여섯이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가 나를 보기만 하면 이유도 없이 때리고 잔소리해서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고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이 있으면 아빠를 먼저 부르고 엄마는 뒷전이었다. 애들 아빠가 돈을 못 벌어 흉이지 애들은 정말 예뻐하고 아이들한테 참 잘했다. 남편 덕에 내가 장사를 나가도 집 걱정은 덜 하게 되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대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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