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Oct 05. 2021

47년생 엄마 #18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6장 돈돈돈(36~41세)     


이복 남동생     


  이사 가고 얼마 후 친아버지 제삿날이라 언니하고 둘이 제사 지내러 갔다. 사촌 오빠는 우리 아버지 좋은 데 보낸다면서 절에 친아버지 이름을 올리고 사십구재를 지냈다. 절에다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우리한테 밤새도록 절을 하라고 했다. 나는 천주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사촌 오빠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하기 싫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친아버지가 극락세계로 가신다고 하니 날 밝을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몇천 번을 외우며 절을 했다. 날이 밝아 그만 절하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오촌 아제 집에서 또 친아버지가 저승에서나마 좋은 데 가서 사시라고 제사를 지낸다기에 언니랑 나랑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가 끝나고 이번에는 이복 남동생이 누나를 따라간다고 바짝 따라나섰다. 이복 남동생은 그해 막 중학교를 마쳤다. 오촌 아지매는 이복 남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이 돈도 훔쳐다 쓰고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더는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이복 여동생을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난처한 처지라 이복 남동생을 살살 달랬다.

“사촌 형이 한약방을 하는데, 거기서 우선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일을 배워보는 게 어때?”

“싫어요. 나는 죽어도 누나만 따라갈래요.”

이복 남동생이 이렇게 나오니 할 수 없이 군산에 데리고 왔다. 


  어머니는 이복 여동생 하나 데리고 왔을 때도 내보내라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이복 남동생까지 데려오니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복 남동생은 친아버지와 살 때 이불에 불이 붙어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그게 한쪽 볼에 크게 흉터가 남아 남들 보기에 싫을 정도였다. 군산 영동에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약국이 있었는데 화상에 좋은 연고를 판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 약을 발라야 화상도 잘 아물고 흉터도 없어진다고 해서 화상 약을 사러 갔더니 약값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도 비싼 약을 사주면서 동생에게 바르라고 했다.


  또 그냥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 나랑 장사라도 하자면서 청과시장에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쳤다. 물건을 사다가 얼마에 팔아오라고 시키면 이복 남동생은 꼭 본전도 안 되게 돈을 가져왔다. 이복 남동생은 장사를 가르쳐 준 큰 동생처럼 잇속이 밝지 않고 얼굴에 흉터도 있어 사람들 대하는 장사가 어려워 보였다. 장사해도 자꾸 빚만 지게 되니 청과물 장사는 치워버렸다.


  그러다 기술을 가지면 평생 먹고살 것 같아 이복 남동생을 차 고치는 정비 학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차가 많으니까 정비 기술을 잘 가르쳐서 정비 공장을 차리면 장가도 보낼 수 있고 잘 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비 학원을 알아보니 군산에는 학원이 없었다. 익산에 한 군데가 있어 익산에 있는 정비 학원에 등록을 시켰다. 이복 남동생은 몇 번 시외버스를 타고 학원에 다니더니 오토바이를 사주라고 졸랐다.

“누나, 차 시간이 잘 안 맞아서 학원에 다닐 수가 없어. 나 오토바이 사주면 학원에 다니고 안 사주면 안 다닐 거야.”

이복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오냐오냐하며 키워서 그런지 눈치도 없고 자기 엄마한테 조르는 것처럼 막 무간으로 떼를 썼다. 이럴 땐 밥을 줘도 배가 아프다면서 밥도 잘 안 먹었다. 저러다 병이나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할 수없이 오토바이를 백만 원을 주고 사주었다. 


  20일도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사고로 피를 철철 흘리며 다리를 다쳐 절룩절룩하며 집에 왔다. 상처를 보니 다행히 타박상만 입었다. 그런데 사고 난 오토바이가 궁금했다.

“백만 원이나 주고 산 오토바이는 왜 안 갖고 오냐?”

“다 부서져서 고물 장사가 가져갔어.”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놀랬으니 다시는 오토바이 사 달라고 하지 않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뒤로도 이복 남동생이 6개월 자동차 정비 학원에 다니는 동안 계속 뒷돈이 들어갔다.

“누나, 차 고치려면 부속품을 사야 해.

“장비도 필요해”

“운전면허도 따야 돼.”

장비값, 부속 값 같은 것들을 주었고 운전면허 학원도 보내주었다. 이렇게 6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정비 선생님이 기술을 더 배우라고 이복 남동생을 정비 공장에 넣어 주었다.


  처음 공장에 들어가면 수습생이라 일을 해도 돈을 주지 않았다. 이복 남동생은 공짜로 일해주면서 배우라고 하니 시들해져서 조금 다니다가 돈도 안 된다며 서울로 돈 벌러 가야겠다고 했다. 친구가 서울에서 양말 공장에 다니는데 자기도 거기에 취직한다고 했다. 돈만 잔뜩 쓰고는 기술도 배우지 않고 서울 간다기에 내가 말렸다.

“서울 가면 다시는 누나네 집에 올 생각하지 마.”

그래도 기어이 서울에 가더니만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누나, 방 하나만 얻어주면 공장에 다니면서 잘 살게.”

“안 돼, 너는 내 말도 안 듣고 네 맘대로 하니 더 이상 너를 도울 수가 없어.”

처음에는 이렇게 딱 잘라 거절했지만, 남동생이 자꾸 전화해대는 바람에 안 해주면 도둑질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서울 사는 둘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째 사위는 경찰이라 둘째 사위에게 천만 원을 부치고 둘째 사위 명의로 전세방을 얻어주라고 부탁했다. 방주인에게 전세 돈 빼 달라고 하면 절대 빼 주지 말라는 각서도 받았다.


  그런데 일 년도 안 되어 집주인한테 방을 빼 달라고 전화가 왔다. 알아보니 이복 남동생이 같은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하고 연애했는데 연애하느라 전세 돈을 솔솔 다 빼 써서 그런 것이었다. 사귀는 아가씨는 한국 사람이긴 한데 옛날에 러시아에 이민 간 고려인이었다. 아가씨가 연애하다가 러시아로 들어가 버려 동생이 러시아까지 가서 아가씨를 데려왔다고 했다. 그러니 돈 천만 원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이복 남동생은 아가씨를 데려와 그 방에서 살다가 방값이 없으니 집주인에게 쫓겨나게 생겼으니 나에게 또 연락했다. 


  이동 남동생이 사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내가 돈 만드는 공장도 아니고 전세 얻어준 돈도 빚을 다 갚지도 못했는데 또 손을 벌리니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내 말은 안 듣고 계속 손을 벌리는 동생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더는 돈 못 보태주니 너 알아서 잘 살아. 이제 나하고는 인연을 끊고 사촌 오빠한테 가서 장가를 보내달라고 사정해봐. 그리고 우리 집에 다시 찾아오려거든 천만 원 갖고 찾아와.”

내가 더는 이복 남동생의 뜻을 받아주지 않으니 이번엔 사촌 형에게 가서 손을 벌렸다. 사촌 오빠는 친아버지가 살던 집을 팔아 장가를 보내고 집도 얻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복 남동생은 장가를 가서 살림을 차리고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다. 그러다 아들이 네 살쯤 되었을 때 아들을 오토바이에 태워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서 하늘나라로 갔다. 그렇게 허망하게 갈 거면 왜 태어나서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이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냐면서 한탄했다. 그때 셋째 딸이 아들을 낳은 지 하루밖에 안 되어 바라지하느라고 장례식에 참석 못 했다. 


  나중에 동생 댁을 찾아가 위로해 주었다. 지금껏 동생 댁은 아들 하나 키우면서 잘 살아 있다. 신랑 없이 혼자 남은 동생 댁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린 나이에 혼자되었는데도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 것을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가서 내가 온갖 고생을 하며 컸는데 동생 댁은 누구에게 신세 질 생각도 안 하고 아들을 잘 키워 지금은 그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이복 여동생    

 

   이복 남동생이 서울에 먼저 올라가고 얼마나 있다가 이복 여동생도 야간 고등학교를 마치고 친구가 서울에서 오라고 한다면서 서울로 갔다. 이복 여동생은 서울 공장서 한 삼 년간 일하다 군산으로 내려왔다. 여동생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 내가 중신을 해 청과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 아들하고 결혼을 시켰다. 결혼은 성당에서 하는 혼배미사로 했다. 경주에 사는 사촌 오빠와 집안 친척들이 결혼을 축하해주러 왔다. 축하한다며 이불도 해주고 축의금도 전해주었다. 나도 성당에서 결혼한다고 가락지 묵주 최고 좋은 것 두 개 주고 새신랑 양복값 백만 원과, 미사비를 냈다. 언니지만 부모 역할을 하느라 내 나름대로 고생했다.


  그렇게 시집을 가서 잘 살아야 하는데 툭하면 싸워서 병원에 가서 누워있다. 내가 병원비 내고 우리 집에 데려다 놓으면 동생 남편이 와서는 동생을 달래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또 싸워서 병원에 누워있다가 데려가라고 남편한테는 전화 안 하면서 꼭 나한테 전화를 해서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다. 내가 병원에서 찾아다 우리 집에 데려다 놓으면 동생 남편이 나 없을 때 몰래 와서 각시를 빼내 갔다. 그 이후로도 계속 그렇게 싸워서 내 속을 썩이고 내외간에 내 뱃속을 뒤집었다. 그래도 지금은 두 내외간에 돈도 잘 벌고 정 좋게 잘 산다.  


이전 17화 47년생 엄마 #17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