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Oct 07. 2021

47년생 엄마 #20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7장 청과 시장과 함께한 세월 (42~54세)   


색시 장사 단골집     


    군산은 항구라 색시 장사가 잘 되었다. 군산 감독하고 개복동, 군산극장 뒤에 스탠드바, 술집과 나이트클럽이 죽 늘어서 있어 밤마다 불야성이었다. 술집에서 제일 비싼 안주는 과일 안주라 술장사가 잘 되면 과일도 잘 팔렸다.


내가 둘째 업고 옥수수 쪄서 팔 때도 보름에 한 번씩 배가 해망동 째보선창으로 들어오면 배 타는 사람들이 우르르 술집으로 가 번 돈을 다 써 버렸다. 한 번은 내가 밤 12시에 애기 업고 옥수수 가져갔는데 선원 한 사람이 그걸 다 사서 술 먹는 사람에게 나눠 준 적도 있었다.


죽성동 시장에서 장사를 한 뒤로 영업집 단골이 많아 과일이 잘 팔렸다. 술집들은 저녁 장사라 전화로 주문을 하면 10시까지는 배달을 해 주었다. 장사를 거의 마치고 집에 들어갈 즈음 영업집을 돌면서 과일 배달을 가면 나이트클럽에서는 여자들이 홀딱 벗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사람들이 흥청망청 돈을 썼다.


 또 군산에 점쟁이들이 판을 칠 때라 여기저기서 굿을 많이 했다. 특히 배 선주들은 한 번씩 바다에 나갈 때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나는 무당 단골도 많았다. 굿은 제사를 지내는 거라  좋은 과일만 골라서 사갔다. 


아직 군산 내항이 살아있을 때라 배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째보 선창에 배들이 들어와 선원들을 군산에 풀어놓으면 선원들은 보름 살이 돈을 선주들에게 받아 군산 감독, 군산 극장 뒷골목 색시들에게 가서 돈을 다 쓰고 갔다. 목포에 갈 배도 군산 아가씨들이 그리웠던 선원들이 군산으로 가자고 졸라서 군산에 배를 내렸다. 술장사하는 사람들도 아가씨들이 돈 벌어 준다면서 아가씨들 준다고 과일을 많이 사갔다.


당시는 배 사업이 잘 되니  장사도 잘 되고 술장사가 잘 되니 액세서리, 옷, 먹거리 등 무슨 장사를 해도 잘 되었다. 그때는 군산에 돈이 지글지글했다. 2002년에 개복동 술집에서 색시들이 불이 나서 죽고서는 군산에서 색시 장사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 때 성매매 방지법이 만들어져 그런 가게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요즘은 군산 외항에도 외항선이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게 많은 배가 드나들던 째보선창은 막아서 더 이상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 옛날의 영화가 온데간데없다. 

술집에 배달하는 남편(1991)

남편의 허리 디스크 수술     


  젊을 때는 애들 키우고 공부시킬 욕심으로 오로지 돈돈 하면서 돈만 벌었다. 내가 이렇게 장사를 크게 할 때 남편이 옆에서 무거운 것들을 다 옮겨주고 배달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걸음을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허리에 있는 신경이 눌려서 다리가 아픈 겁니다. 큰 병원에서 수술하세요.”

다행히 간호사인 셋째 딸 아는 사람을 통해 경희대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훌륭한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 허리도 잘 낫고 걸음도 다시 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당뇨도 생기도 혈압도 있고 해서 힘을 못 쓴다. 남편이 아파서 고생하는 걸 보니 장사하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과 시장


  내가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과일을 떼다가 리어카 장사를 시작한 것은 우리 둘째가 두 살 때였다(1972년).

어카 장사를 꼭 10년 하고 아들이 태어난 후에 죽성동 청과시장에 자리를 잡아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또 10년 뒤에 문화동에 청과 시장이 새로 생겼다(1992년). 청과시장이 커지다 보니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경매할 때 시끄럽고 하루 종일 과일 야채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민원을 많이 넣었다. 그래서 작은 약관인 문화동 청과시장이 생겼는데 죽성동이 큰 약관이라 상인들은 거의 그대로 거기서 장사를 했다. 그래도 그쪽으로 이사를 가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계속 죽성동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문화동 청과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면 중매인들이 트럭으로 물건을 실어다 주었다.


  그러다 4년 뒤엔 아예 죽성동과 문화동 청과 시장을 없애고 수송동에 농산물 공판장을 만들어 상인들을 다 이사시켰다. 죽성동 시장 자리엔 농협은행이 크게 들어서고 뒤쪽 자리엔 하나로 마트가 생겼다(1996년). 문화동 청과시장 자리에는 다우미빌 아파트 한동이 세워져 있다(2002년).


  수송동 청과시장은 지금도 논 한 복판에 덩그러니 있어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장사가 잘 안됐다. 그래도 시장을 없앴으니 상인들은 수송동 시장으로 가야 했다. 수송동 시장에서 좋은 자리를 못 뽑은 상인들은 그냥 죽성동에 남았다. 그중에 돈 많은 상인들은 죽성동 청과시장 근처에 가게를 냈고 돈 없는 상인들은 그냥 거리에 물건을 늘어놓고 노점을 했다. 내 옆에서 장사를 크게 했던 미애네도 노점을 하며 물건을 조금만 가져다 팔았다.


 그 당시 남편이 큰 수술을 하고 청과시장도 이사를 하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시장 상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나에게 장사를 그만 하라고 했다. 나만 물건을 잘 팔고 자기네들은 물건을 못 파니 그런 소리를 할 만도 했다. 나도 목 디스크도 생기고 몸도 여기저기 아프니 과일 장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전 19화 47년생 엄마 #1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