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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12. 2021

47년생 엄마 #21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7장 청과 시장과 함께한 세월 (42~54세)  


서해 페리호의 침몰     


  청과시장이 문화동 시장으로 나누어지고 아직도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대형 참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군산에도 큰일이 터졌다. 군산 근처 섬 위도에서 배가 가라앉아 죽은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니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시체를 군산 공설 운동장으로 옮겨왔다. 공설 운동장에 장례식장이 차려지고 죽은 사람들 가족들, 자원봉사자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군산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장례식장이 많이 없었다. 사고가 났다고 공동 장례를 치르는 게 아니라 시체를 찾으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거기서 각자 빈소를 차려놓고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장례상도 여러 번 차려졌다. 장례를 치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먹이느라 사람들은 청과시장에서 크고 좋은 과일만 몇 차씩 사갔다.


  과일을 많이 팔아주니 이문을 조금씩 붙이고 팔아도 돈은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 너무 안타까웠다.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인데 세월호가 가라앉아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갔다. 내 평생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해 페리호 침몰 기사(전북도민일보 1993년 10월 12일자)


군산 새만금 개발 


  노태우 대통령 때 새만금 개발이 시작되었다. 오식도는 고기도 잘 잡히고 특히 조개가 많이 나왔다. 군산 사람들도 조개 캐려면 오식도로 갈 정도였다. 오식도, 하제 주민들은 농사도 안 짓고 고기 잡고 조개를 캐서 먹고살았다.


  단골손님 중에는 오식도 사람이 많았다.  뱃사람들 먹이고 뱃길 떠날 때 제사 지낸다며 과일을 사러 오면 몇 차씩 사 갖고 갔다. 그런데 새만금 개발을 한다면서 오식도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시작했다. 어부들 각자 바다 구역과 바닷가 집들에 보상을 해 주었다. 거기서 배 몇 채씩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을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판잣집 같은 집이어도 이사 가게끔 보상을 해 줘서 오식도 주민들은 다 쫓겨났다.


  그러고 나서 한 2~3년 지 어느 날 오식도 주민이었던 한 아주머니가 과일을 사러 와서 통곡을 했다.

“우리 집에 배가 세 채나 되고 집도 있고 해서 보상 많이 받았죠. 그걸 남편이 가져다가 술 먹고 놀음해서 다 날렸어요. 제 주변에 어떤 사람은 보상금으로 차를 사서 차 타고 다니다가 차 사고가 나서 쫄딱 망했고요. 놀음하다 돈 날린 사람이 허다해요. 평생 물질만 하고 살아서 그런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더라고요. 먹고 살 일을 대비를 하고 돈을 써야 하는데 그냥 돈이 생기니까 막 써서 오식도 사람들은 대부분 다 거지가 됐어요.”


  오식도 사람들은 보상금이 부족하다면서 다시 시위를 해서 시에서 다시 보상을 해 주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평생 해 온 일이 바다일이고 바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 오식도에서 쫓겨나자 뭘 해 먹고 살 줄을 몰랐다. 가게를 냈다가 망한 사람도 있고 기반 없이 다른 곳에 가서 다시 바다 일을 하다 적응을 못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보상받은 돈이 떨어지면 거지가 되는 것이었다.


  오식도 주민들은 안타깝게 쫓겨났지만 새만금 개발이 시작되면서 군산에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트럭들이 계속 흙을 퍼다 나르며 바다를 메웠다. 다리를 놓을 때, 하나 일을 끝내고 다른 일을 시작할 때 건설회사에서는 꼭 잘하게 해 달라고 굿을 했다. 굿을 할 때도 크고 좋은 과일은 필수였다. 건설회사에서 트럭에 사과, 배를 좋은 것만 골라 몇 차씩 사 가지고 갔다.


  새만금에 있는 함바집 아줌마와 거래를 트기 시작해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은 트럭으로 야채와 과일을 실어 날랐다. 함바집에 2~3 동안 야채, 과일을 넣어 주었다. 청과시장을 문화동으로 옮기고 죽성동 시장에서 경매를 안 하니까 그 아줌마가 내 가게로 오지 않아 그 좋은 거래처를 떼였다. 새만금 개발이 늦어지고 1997년 IMF가 닥치기 전까지 그렇게 장사가 잘 되었다.      


IMF 시대(1998년)     


  경성 고무 회사는 구 기차역 앞에 있었다. 둘째를 업고 리어카 장사할 때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그 회사 앞에서 기다리면 사람들이 퇴근하고 나오면서 과일, 야채를 사 가지고 집에 갔다. 그렇게 한 리어카를 팔고 얼른 청과시장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또 팔고 그랬다.


  경성 고무 회사 사장은 이용구였는데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팀을 만들고 지원해서 군산상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군산에는 경성 고무 말고도 백화 양조도 있어 제삿날이면 집집마다 백화 양조에서 나오는 청주를 사다가 제사를 지냈다. 고판남이 운영하는 합판회사도 직원이 천명 넘게 있었다. 또 밀가루를 만드는 회사인 호남 제분도 군산에 있었다.


  큰 회사들이 군산에 있으니 과일 팔기도 좋았는데 그렇게 장사가 잘 되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시대가 지나고 IMF 시대가 왔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사람들이 집에 있던 금붙이들을 다 꺼내 나라 살린다고 팔았다. 이렇게 해도 살림은 나아지지도 않고 군산에 있던 회사들은 다 외국으로 나가 일자리가 없어졌다.


  나도 과일 장사가 안 되어서 하루 장사를 접고 하제에 조개를 캐러 쫓아가 본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조개를 캤는데 별로 캐지도 못하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허리랑 무릎이 아파서 혼났다. 그러고는 다시는 조개 캐러 가지 않고 그냥 장사가 잘 되거나 말거나 과일 장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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