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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13. 2021

47년생 엄마 #23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8장 귀농 생활(55~현재)     


3층 건물을 올리다

     

  IMF 시대가 지나고 몇 년 지나니 경기가 다시 좋아졌다. 나는 수송동 집에 딸린 가게에서 계속 장사를 했다. 수송동이 택지 개발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집 근처에서 공사를 많이 했다. 나도 새로 집을 지어 세를 놓고 장사도 크게 하고 싶었다. 마음먹으니 금방이었다. 집을 뜯고 3층으로 건물을 올렸다. 잘 지어 놓으니 신경외과에서 세를 얻으러 왔다. 병원이 1,2층에 들어오고 나는 3층에 살았다. 


그런데 집을 지으면서 처음 계산보다 1억이라는 돈이 더 들어갔다. 생전 빚지고 산 적이 없는데 1억이나 빚을 지니 잠이 안 왔다. 집을 짓는 동안 나도 힘이 들었는지 건강이 나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어 집세만 받아서 살기로 했다. 큰 건물에 세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계약을 했더니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 1억 빚에 세 받아서 세금 내고 나면 한 달 생활비도 되지 않았다. 집 잘 지어서 병원만 좋은 일 시킨 것이다. 


또 문제는 부실 집이었다. 집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벽에 금이 가고 창문이 떨어지기도 했다. 세금도 많은데 집 고치느라 뒷돈이 계속 들어갔다. 집을 팔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초도 땅에서 농사짓는 친구를 만났다. 

“내초도 논 한 배미 팔아서 부안에 논 만 육천 평을 샀어. 평당 2만 5000원밖에 안 하더라고.”

나도 논을 사서 농사를 짓고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집 시세가 10억 정도 받을 수 있었는데 부실 집이라 양심에 걸려 7억으로 내놨다. 집이 싸니까 3층 집은 금방 팔렸다. 그 집짓기 전에 헌 집을 5억 5000만 원 준다는 것을 안 팔고 집을 지었는데 집 짓는 데만 3억 5000만 원이 들었으니 9억짜리 집이다. 그런 집을 7억에 팔았으니 많이 밑지고 팔았다.    

  

수송동에 신축한 3층 건물을 밑지고 팔았다(2017)

신안 지도에 논을 사다     


  집을 팔고 부안에 가서 땅을 사려고 하니 그새 땅 값이 올라서 평당 4만 원씩 달라고 했다. 그 땅도 좋지도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집도 팔았는데 땅을 못 사니 마음이 바빴다. 장사를 그만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땅이 싸고 좋다는 데에 다 가보았다. 그런데도 마음에 차는 땅이 없었다. 


  그러다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에 논 오천 평이 연답으로 나왔는데 그게 한 사람 것이라 한꺼번에 다 판다고 했다. 그 땅을 다 사려면 돈이 부족해서 내초도에 있는 땅을 팔기로 하고 땅을 내놨다. 사람들이 새만금에 들어가는 땅이라 많이 보고는 갔지만 싸게만 사려고 해서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값을 깎아 나중에는 평당 20만 원에 팔았다. 그 돈을 보태 전남 지도에 논 오만 평을 샀다. 


  농사를 지으려면 집도 있어야 했다. 내가 산 논 옆에 언덕이 있었는데 거기에 집을 지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장을 찾아가 그 땅 주인을 알아보니 땅주인 하고 이장이 잘 아는 사람이라 이장 소개로 집터도 쉽게 살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집을 멋지게 짓고 농기계 창고와 비닐하우스도 지었다. 거창하게 시작은 했는데 여태까지 농사를 논 두 배미만 짓다가 한꺼번에 많이 지으려니 정말로 힘이 들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계속 시험에 떨어졌다. 

‘아들이 공부하다 장가도 제때에 못 가겠네.... 차라리 농사짓게 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들에게 새로 산 논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아들은 생전 기계를 만져 본 일도 없는데 기계를 부리려고 하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속이 터져서 모내기를 할 즈음에 모를 심다가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모를 다 심을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도망만 다녔다. 나도 속이 터졌지만 일 년 농사라 때를 놓칠 수는 없고 모만 다 심어 놓은 다음에 나도 집을 나와 버려 한 달이 넘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고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아들이 농사 잘 짓는다는 확답을 받고 집으로 들어갔다.      


하느님의 은총  

   

  삼층집 팔기 전에 성당에서 성전 건축을 한다면서 바자회를 열었다. 수녀님은 집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별로 낼 물건이 없었다. 물건이라고는 아이들이 아버지 드시라고 가져온 술 밖에 없었다. 그 술을 바자회에 가져갔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좀 부족한 것 같아서 더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다 내가 작년에 농사지었던 콩을 발견했다. 이 콩은 농사지어 놓고도 너무 싸게 나가 아까워서 못 판 것이다. 종류는 좀도리 콩이라고 아주 잘면서 까만 약콩이다. 그 약콩이 비싸다고 해서 1kg에 8천 원씩이나 주고 씨를 사다 심었는데 수확해서 팔려고 하니 중국 수입 콩들이 많이 들어와 1kg에 2500원밖에 안 나갔다.

‘이 콩을 싸게 팔지 말고 성당에 갖다 성물로 내면 우리 성당 식구들은 싸게 사 먹고 성당 짓는데도 도움이 될 거야.’

성당 바자회에서 낸 콩은 1kg에 5000원씩 잘 팔렸다. 잘 팔리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한데 붙은 논 5만 평을 사놓고 끝도 없는 논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자디잔 콩을 하느님께 바쳤더니 우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많은 땅을 주셨구나. 장사밖에 모르던 내 마음을 바꿔 주셔서 땅을 사게 해 주신 하느님이 정말 고맙다. 그렇게 많은 땅을 가지려면 하늘에서 내린 복이 있어야지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처음 군산에 와서 구시장을 간 적이 있다. 구경하다 역전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그런데 한번 화장실에 갔다 오면 그때 돈으로 5원을 내야 했다. 나는 5원도 없어 화장실 옆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러다 돈 받는 사람이 잠깐 어디 간 사이에 얼른 집으로 도망쳐 왔다. 돈 5원이 없어 도망 온 사람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많은 은총을 내려 주셨다.

그 해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많이 드렸다. 

‘하느님 내가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내가 일생을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을까 생각해볼 때 하느님 도움 없이는 그런 돈을 못 벌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 뒤로 농사일 년 짓고 나서 며느리도 내 마음에 드는 며느리를 얻어 아들을 장가보냈다. 또 손자도 얻었다. 아들이 맘 잡고 농사를 잘 지으면서 돈만 생기면 땅을 샀다. 논 오만 평에 더 사서 자꾸 보태니 땅이 많아져 농사도 더 많이 짓게 되었다. 아들 내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잘 살고 있다. 내가 살아온 것을 죽 생각해보면 친척들이 그렇게 돈을 많이 빌려가고 이제까지 갚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 하느님이 그것을 배로 갚아 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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