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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12. 2021

47년생 엄마 #22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7장 청과 시장과 함께한 세월(42~54세)     


수송동에서 다시 장사 시작     


  청과시장이 수송동으로 이사 가고 죽성동 청과시장을 치워버린 후에 장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았다. 그런데 집에만 있자니 갑갑해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수송동 청과시장에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서 시장 가장 안쪽에다 물건을 조금씩 놓고 팔기 시작했다.

수송동 청과시장 구석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하고 내가 다시 장사 시작했다는 말이 돌면서 단골들이 찾아왔다. 또 그 동네 단골들도 생겨 장사가 잘 되었다. 중매인들도 못 파는 물건이 있으면 팔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내가 장사를 잘하니 청과시장 가장 안쪽 자리인데도 내 주변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기스 장사들이 내 자리 주변에 뺑 둘러앉아 장사를 하며 내 손님들을 많이 채갔다. 선희네 엄마는 내 옆자리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인데 손님을 가장 많이 채간 사람이다. 나중에 내가 우리 집으로 가게를 옮기자 우리 집 건너편에 가게를 내고 이사까지 왔다. 나는 그 집을 팔고 이사 갔지만 선희네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과일 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물건을 잘 파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식당에서 물건 사러 오면 그날그날 시세대로 싸고 좋은 것을 권하고 조리법까지 다 알려준다. 그 상황에 맞춰서 야채, 과일을 권하니 사람들은 내 말을 믿고 사간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게 가장 값이 싸다는 구시장에 가서도 내 보다 더 싸고 좋은 것은 없다.


  사람들은 내가 박스 바꿔치기를 한다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에는 지금처럼 과일 크기가 고르게 나오지 않고 꼭 알박기를 했다. 알박기는 박스 위에는 크고 좋은 것을 두고 속에는 꼭 잘고 못난 놈들을 박아 두는 것이다. 그러면 손님들이 과일을 사 갔다가도 다시 바꾸러 왔다. 나는 시간 있을 때마다 박스를 뒤집어 크고 좋은 것 따로, 나쁜 것 따로 박스를 새로 만들어 팔았다. 썩은 것은 맛보기로 내놓거나 기스 박스를 만들어 싸게 팔았다. 이렇게 하면 박스 속까지 물건이 좋기 때문에 바꾸러 오는 손님이 없었다. 수박 같은 것도 이쁘게 보이려면 깨진 수박의 속살로 수박 겉면을 닦아줬다. 그러면 초록색 수박 겉면이 반짝반짝 윤이 나 맛있게 보였다. 이렇게 사람 비위를 맞추고 싸고 좋은 물건을 예쁘게 해서 파니 장사가 잘 안 될 리가 없었다.


  수송동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잘하고 있는데 또 나만 많이 사서 팔고 돈을 많이 버니까 다른 상인들이 자꾸 장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는 가게가 두 칸이 있었다. 한 칸은 슈퍼로 세 놓았고 다른 한 칸은 새시 하는 사람이 세를 들어 가게를 했는데 마침 가게를 늘려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수송동 청과시장에서 나와 비어있는 가게에 조금씩 야채, 과일을 사다 놓고 팔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단골도 많이 생겨 장사가 커졌다. 수송동 집 근처에 콩나물국밥집, 횟집, 밥집, 빵집 등에서 거의 우리 집 물건을 가져갔다. 그때는 수송동 횟집 거리에 큰 횟집이 10개 정도 있어 밤마다 예약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장사할 때는 그렇게 장사가 잘 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횟집 두 곳만 남았다.


외상     


  손님들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사다 보면 돈이 부족할 때가 많다. 현금 10만 원을 들고 와서 15만 원 정도의 물건을 내놓고는 5만 원 외상을 단다. 

“오늘 이 물건이 필요하니 가져가고 모자라는 돈은 다음에 꼭 갖다 줄게요.”

손님들이 이렇게 외상을 달아놓고는 밀린 돈은 잘 안 갚았다. 특히 영업집들은 물건을 많이 사 가기는 하는데 외상 달아놓고 돈을 안 주는 경우가 많았다. 


  45년 동안 장사하면서 그동안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번 돈의 3분의 1은 외상으로 떼였다. 그 돈 다 받았으면 큰 집 한 채는 더 지었을 것이다. 장사하다 보면 안 준다는 돈은 결국 받지 못한다. 그 돈 받으려면 내가 먼저 지친다. 그러니 돈 받는 것을 포기하는 게 수다.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빌려준 돈을 잘만 받더니만 누구도 내 돈 갖고 간 사람은 돈 갚아 주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외상 물건은 안 팔려고 노력을 했지만 거래를 하다 보면 어쩔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한번 올 때마다 달아 놓고 가는 돈이 금방금방 불어나서 몇십만 원이 몇 백만 원이 되었다. 이렇게 많이 불어나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나한테 물건을 사러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원래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그렇게 돈을 많이 떼여도 억울한 마음은 없다. 그 사람들이 내 물건을 많이 팔아 주었으니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돈 받아야 할 사람을 우연히 만나도 박절하게 돈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그 사람들에게 달라고 해야 주지도 않지만 내가 먼저 달라고도 않는 것이다. 전에 하느님께 기도할 때 모든 것을 선으로 풀어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 후로 그렇게 살았고 그러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   


우리 오 남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과일 사러 와서 우리 집 딸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하는 데 가 봤더니 아줌마 딸만 계속 상을 받았어요. 정말 좋겠어요.”

장사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막내딸이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하는데 똑같은 국어사전을 여섯 권을 받아 왔다. 상장을 주면서 상품으로 국어사전을 한 권씩 끼워 주었다고 한다. 장사하느라 졸업식도 못 가서 딸이 상 받는 것도 못 봤다. 오 남매 키우는 동안 학교에서 학부모를 부르면 늘 신랑이나 언니가 대신 가고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엄마, 선생님이 나는 엄마가 없냐고 그러잖아. 이번에는 엄마를 꼭 모시고 오라고 했으니 꼭 학교에 와.”

아이들이 이렇게 신신부탁을 해서 장사하다 학교 가려고 옷이랑 다 싸 갖고 갔어도 손님이 계속 와서 번번이 학교에 못 갔다. 이렇게 아이들 다섯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한 번도 학교에 가보지도 못했다.


  하루는 장사 끝내고 집에 늦게 왔다. 그때까지 막내딸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딸에게 말했다.

“밤도 늦었는데 공부 그만하고 자라.”

“다른 집 엄마들은 자꾸 공부하라고 한다는데 엄마는 왜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는 딸을 보니 책상 밑에다 세수 대야를 놓고 물에 발을 담가 놓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잠이 와서 잠 깨라고.”


  애들 다섯을 키우면서 딸 넷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딸들은 공부를 잘해서 직장도 잘 잡고 시집도 자기들이 알아서 잘 가고 잘 산다. 아들만 공부를 잘 안 하는 것 같아서 공부하라고 했다. 우리 자식들 오 남매는 한 번도 내 속을 썩인 적이 없는데 내 친정 동생들 네 명 때문에 더 힘이 들었다. 우리 오 남매는 집에 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봐주고 내가 힘들게 장사해서 자기들 공부시키는 것을 늘 보고 있으니 가정교육이 잘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 성공하면 그게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학원을 안 보내도 다른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했다. 대학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들어가서는 아르바이트해서 용돈도 벌고 장학금도 받았다. 다들 결혼도 잘해서 지금껏 내 속 한번 안 썩이고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다. 내가 부모 잘못 만나 공부도 못했으니 내 자식들만은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공부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공부를 잘하고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가니 정말 고맙고 기쁘다.


셋째 딸


  둘째 딸을 줄곧 업고만 다녀서 다리에 골수암이 생겼으니 셋째 딸은 업고 장사를 다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창성동 달동네였는데 창성동 아랫자락에서 한 할머니가 아이를 봐준다고 했다. 아침에 장사하러 갈 때 그 할머니네 집에 셋째 딸을 데려다 놓고 분유통, 기저귀 보따리를 주면 그 할머니가 아이를 하루 종일 봐주었다. 한 달쯤 아이를 맡겼는데 통통하던 아이 볼에 살이 빠지고 체기가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 약을 먹이면 며칠쯤 괜찮다가 조금 지나면 또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둘째 딸이 아팠을 때처럼 장사하면서 손님들에게 아이 병을 자랑했다.

“우리 아이가 체기가 있는데 병원에 다녀도 낫지를 않아요.”

“저기 명산동 산 끊어진 데 가면 할머니 한 분이 계신데 체를 잘 뺀다고 그러데요.”

손님 말을 들은 뒤 셋째 딸을 데리고 명산동에 체 빼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명산동 언덕에 있는 작은 집에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아이 배를 까서 쓰다듬기도 하시고 아이 입을 벌려 입안을 살펴보시기도 하셨다. 그러다 아이 입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으시더니 뭔가를 빼냈다.

“비닐 조각이 아이 목구멍에 걸려 있구먼. 이제 됐네.”

할머니가 건네주는 비닐 조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가 기어 다니며 방바닥에 있는 비닐 조각을 집어 먹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례를 어떻게 해야지요?”

“그냥 가세요.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서 아이를 업고 집에 왔다. 그 뒤로는 체기가 빠져 아이가 잘 먹고 살도 통통하게 올랐다.

그 뒤로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업고 다니며 장사할망정 다시는 남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 맡긴 집 할머니가 자기 손자들한테 내 딸 분유도 다 먹이고 우리 아이에게는 분유도 많이 안 주었다고 했다.


  셋째 딸은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약했다. 아토피도 있어 몸을 긁으면 상처가 나고 잘 낫지 않았다. 또 고기도 먹지 않았다. 한 번은 아이에게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빈손으로 그냥 왔다.

“왜 고기를 안 사 갖고 왔어?”

못 사겠어요.”

아이가 키우던 개를 동네 사람들이 잡는 것을 보고 놀라서 고기를 못 먹게 되고, 고기 사 오는 것도 못하게 된 것이다.


  운동 신경도 없어서 늘 넘어져 무릎을 깨 왔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늘 상위권이었는데 체력장에서 점수가  깎였다. 이런 애가 대학교 갈 때 간호학과를 간다고 하니 집안사람들이 다 말렸다. 피가 무서워 고기도 못 사 오면서 어떻게 살에서 피를 빼고 주사를 주겠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셋째 딸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약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셋째는 늘 잘 살고 있다.      


면회 못 가서 미안해     


  하나 있는 아들이 휴전선 근처로 군대를 간 후에 첫 면회 날이 잡혀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 면회 꼭 와.”

“그래, 꼭 가야지.”

아들하고 이렇게 약속하고도 막상 갈 날이 닥치니 여름이라 과일이 다 썩게 생겨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삼일 동안 가게 문을 닫으면 영업집들도 장사해야 하는데 단골들 때문에도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남고 애들 아빠와 누나들만 갔다.  아들이 장가를 가서도 그때 면회 안 간 것이 서운해서 가끔 한 번씩 말을 한다.

“우리 엄마는 아들이 군대 갔는데 한 번도 면회를 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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