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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05. 2021

47년생 엄마 #19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6장 돈돈돈(36~41세)     


오토바이 사고     


  이사 간 집은 터가 넓어 집을 중심으로 뱅 둘러 남는 땅이 있었다. 처음에 그 땅에 텃밭을 만들어 상추도 심고 정구지도 심어 키워 먹었다. 또 신랑이 개를 좋아해 거기에 개집을 만들어 놓고 개를 키워 팔기도 했다. 그러다 집 왼편에 가게를 두 칸 만들었다. 집 지을 때나 가게를 만들 때는 젊을 때 막일 일을 많이 한 남편이 거의 맡아서 했다. 큰 가게는 슈퍼로 세를 놓고 작은 가게는 창틀 새시 하는 사람에게 세를 주었다. 아래채에도 조그맣게 방과 부엌을 만들어 세를 주고 안채에 딸린 방 하나도 부엌을 만들어 월세를 받았다. 남편은 내초도에 논 4,500평에 농사도 짓고 과일 장사도 도왔다. 큰딸은 고등학교 3학년, 둘째 딸은 고등학교 1학년, 셋째는 중학교 1학년, 막내딸은 초등학교 5학년,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라 애들은 이제 다 컸다. 이제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한시름 놓았다.


 좋은 것도 잠시, 남편이 저녁에 나를 데리러 오다 할머니를 오토바이로 치었다. 도롯가에 세워놓은 봉고차에 가려 골목에서 큰길로 나오던 할머니를 보지 못한 것이다. 할머니는 넘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남편은 사고 직후 할머니를 군산 도립 병원으로 모셔가 치료를 받게 했다. 할머니가 도립 병원(현재 군산 의료원)에서 20일 치료를 받는 동안 낮에는 할머니 댁에서 원래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있어 그분이 돌봐드리고 밤에는 내가 병원에 가서 돌봐드렸다. 할머니는 척추를 다쳐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어 똥오줌도 다 받아 내야 했다. 할머니는 낮에는 하루 종일 자고 저녁에는 잠도 안 자고 나랑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놀자고 했다. 


  저녁에 병원에 가면 목욕도 시켜 주고 침대도 닦고 쓰레기도 비워주고 할머니랑 밤새 내가 살아온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됐는데 그 할머니는 알부자였다.

“할머니, 할머니는 돈도 많다는데 이 없는 사람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사정할 정도로 20일간 내 일과는 이랬다. 낮에는 장사하고 저녁에 집에 가서 애들 밥해 먹이고 저녁 8시쯤 되면 할머니에게 병간호하러 가서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 잠 한숨 못 자고 새벽 5시쯤 집에 와 또 밥해서 애들 먹이고 학교에 보냈다. 온종일 일만 하고 잠잘 시간이 없어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저녁부터 할머니를 간병하고 할머니가 잠든 새벽 5시쯤 집으로 오는 데 늦은 가을이라 밖이 캄캄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얼마나 졸았는지 뭘 탁 받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쳤다. 도저히 더는 이렇게 살 수가 없어 경찰인 형부를 찾아가 부탁했다.

“형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형부는 법을 잘 아니 이 일 좀 잘 해결해 주세요.”

“나에게 진작 알렸으면 금방 해결해 줬을 텐데 이제까지 미련스럽게 그 고생을 한 거야? 우선 환자부터 만나 볼게.”

형부가 할머니를 만나 보니 형부하고 잘 아는 사이였다. 형부는 할머니 아들한테 연락해서 아들이 군산으로 내려왔다. 할머니는 아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사고당한 지 20일이 넘도록 아들한테 알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형부는 할머니 아들과 이야기를 해서 합의를 봤다. 우선 20일 동안 있었던 병원비는 운전사가 내고 더 병원에 있으려면 그다음 병원비는 할머니 쪽에서 내기로 했다. 20일 동안 있었던 병원비는 그때 돈으로 200만 원이 넘었다. 그래도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었다. 


그 뒤 할머니는 퇴원해서 집으로 가셨는데 나중에 그 집 밥해주는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할머니는 좀 어때요?”

“아유, 아직도 일어나지 못해요. 아직도 누워계셔서 제가 똥오줌 다 받아내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서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할머니가 다시 일어나 걸어 다니게 도와주세요. 이 세상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고 사는 제가 정말 불쌍하지도 않나요? 저를 봐서라도 할머니 허리를 고쳐주세요.’

그 뒤로는 할머니가 어떻게 사시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남편은 계속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냈고 나는 다친 사람들에게 약값을 물어줘야 했다.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크고 작은 사고를 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다     


  어머니께서 둘째 아들 결혼시키고 조금씩 아프셨는데 갑자기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셔서 병원에 모시고 갔다.

“연탄가스를 마신 것 같습니다. 일산화탄소 중독입니다.”

어머니 집이 지은 지 오래돼서 방으로 연탄가스가 새는 모양이었다.

“태복아, 의사 선생님이 연탄가스를 조심하라고 하는데 네 동생들은 분가하고 누구한테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 네 남편더러 우리 집수리 좀 해 달라고 그래라.”

남편한테 부탁해서 어머니 집 보일러를 수리했다. 우선 연탄가스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부엌에 있던 연탄아궁이를 마당으로 꺼내고 방바닥에 금 간 곳을 막고 시멘트로 다시 발랐다. 도배도 새로 해서 새집같이 해 드렸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어머니는 또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머리 혈관이 막혔다고 했다.

“일단, 혈관약을 드셔 보세요. 신경 많이 쓰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세요.”

의사 선생님이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해서 병원을 나오는 길에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이제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편히 사세요. 동생들도 다 결혼해서 잘 살잖아요.”

“태복아, 이상하게 내 머리가 텅 빈 것 같다. 소머리를 푹 고아서 내 머릿속 골을 채우면 괜찮을 것 같아. 소머리를 사다 줘.”

소머리를 사러 군산을 다 돌아다녔는데도 그날 소머리를 파는 곳이 없었다. 한 정육점에서 내일 가져다준다고 해서 주문을 하고 집에 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나에게 막 화를 내셨다.

“더 병나기 전에 빨리 먹어서 골을 채워야 하는데 왜 빨리 안 사와!”

어머니는 병이 나서 기분 조절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날이 새자마자 얼른 가서 소머리를 사다 드렸는데도 그것을 드시고는 머리가 더 아프다고 하셨다. 


  하루는 어머니 병이 자꾸 더 악화되니 당신이 돌아가실 줄 아시는지 나를 붙잡고 부탁을 했다.

“태복아, 내 앞으로 논 한배미가 있어. 네 형부가 장가 올 때 옷 한 벌도 못해주고 이렇게 내가 군산 와서 잘 사는 것도 네 형부 덕분이니 땅 팔아서 반절은 네 형부 주고 반절은 막내아들 주고 돈 조금 남겨서 내가 쓰고 죽어야겠다. 네가 빨리 그 논 팔아줘.”


중에 갑자기 어머니 병이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버지 밥도 해 드려야 하니 분가했던 큰 동생이 어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병이 자꾸 더 악화되어서 말도 못 하시고 누워서 똥오줌도 다 받아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머리 혈관이 다 터져서 수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계셔야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위중하시다고 하니 서울에 살던 둘째 동생이 내려왔다. 둘째 동생은 어머니가 집에 계신 게 못마땅해서 한 소리했다.

“왜 어머니를 퇴원시켰어? 다시 병원에 입원시켜.”

“의사 선생님이 병원에서 해 줄게 없대. 그렇게 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으면 네가 어머니 모셔다가 서울 좋은 병원에 입원시켜.”

이렇게 둘째 동생에게 어머니 모셔가라고 했더니 둘째 동생은 어머니를 모셔가지도 않고 누나는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고 생으로 죽게 한 살인자라고 하며 술만 먹으면 전화를 해서 막말을 했다. 처음 전화를 했을 때는 둘째 동생이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살고, 막내라 어머니하고 정도 많은데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잘 타이르기도 하고 위로도 해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재산 싸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큰 동생이 나에게 어머니 앞으로 있던 논 한배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하러 왔다.

“일단 네 앞으로 다 해놔. 나중에 땅 값이 오르면 팔아 나누게.”

둘째 동생은 그 당시 학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았고 땅을 이전해주면 당장이라도 팔아서 다 없애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은 그 땅을 큰 동생 명의로 해 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큰 동생은 그 논을 상속받아 자기 명의로 바꿨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둘째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형이 내 앞으로 반절 이전해준다고 해서 도장이랑 주민등록이랑 부쳤는데 내 앞으로 하나도 이전이 안 됐어. 형한테 전화했더니 누나한테 물어보라고 하는데 누나는 아는 게 없어?”

“지금은 땅 값이 얼마 안 되니 나중에 오르면 팔아서 네 몫을 주라고 할게.”


  이게 앞으로 두 형제간에 재산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나는 내 마음만 생각하고 큰 동생 앞으로 다 해놓으라고 한 것인데 그렇게 말한 내입을 백번 천 번이라도 막아버리고 싶다. 땅을 못 받은 둘째 동생은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누나, 내가 지금 천만 원이 필요한테 천만 원만 빌려줘. 금방 돈 나올 데가 있는데 안 나와서 그래. 지금 급해서 그러니 천만 원만 빌려줘.”

그때 내 수중에 쌀 계를 타서 오백만 원이 있었다.

“천만 원은 없고 쌀 계 타서 오백만 원밖에 없어.”

“그럼 그거라도 빌려줘.”

쌀 계 탄돈 오백만 원을 고스란히 둘째 동생에게 빌려주었다. 이렇게 돈을 빌려주고 그 뒤로 쌀 계에 돈을 스무 번 넣어 주었다. 그 돈 빌려주고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큰 동생이 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왔다.

“뭐에 쓰려고 돈을 빌려달라고 그래?”

“둘째 동생이 무슨 사기로 몰려서 파출소에 있는데 합의금을 안 주면 교도소로 넘어간대.”

“내가 얼마 전에 오백만 원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줬는데 둘째 동생이 교도소 갔으면 갔지 더 이상 돈을 빌려 줄 수가 없어.”

“내가 갚을게. 지금 아내가 집에 없어 통장에서 돈을 못 찾아서 그래. 내일이라도 아내 오면 은행 가서 바로 찾아다 줄게.”

“그럼 천만 원은 안 되고 구백만 원이 있으니 그거 빌려 줄게. 꼭 갚아야 해.”

다짐에 다짐을 받고 큰 동생에게 구백만 원을 빌려줬다. 


  그런데 그 뒤로 큰 동생한테 빌려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 돈은 그 당시 논 두 배미 값이다. 동생들에게 돈 안 빌려주고 땅 사두었으면 몇 십억 재산이 될지도 모르는데 동생들은 갖다 쓰고 한 푼도 갚지 않았다. 그러고도 둘째 동생은 어머니 논을 큰 동생 앞으로 다 이전해 놓으라고 했다고 그것을 빌미 삼아 술만 먹으면 전화해서 나를 괴롭혔다. 둘째 동생 전화만 받으면 밤새 잠 한 숨 못 자고 밤을 새워야 했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10년쯤 뒤 어머니 논이 수송동 택지 개발지구로 들어가 보상금이 많이 나왔다. 나는 큰 동생을 찾아가 둘째 동생에게 2억을 떼 주라고 계속 말했다. 큰 동생은 보상받은 후 몇 년 후에 결국 둘째 동생에게 2억을 주었다. 언니나 나는 부모님 재산은 아무것도 못 받았다. 두 형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았으면서 그 논을 사게 해 준 형부나 나에게 옷 한 벌 값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돈 때문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의붓아버지의 용돈     


  의붓아버지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상심이 크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니 또 마음이 안 좋아 위로해드렸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 용돈 한 달에 오만 원씩 드릴게요. 한 달에 한 번씩 저를 찾아오세요. 또 어머니 보고 싶으셔도 오시고요.”

“여기 네가 어머니에게 해 준 금비녀랑 금가락지 있다. 네가 해 준 것이니 네가 가져라.”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거 팔아서 노인정에서 친구들하고 술도 사드시고 재미있게 사세요.”

아버지가 내미는 금비녀랑 금가락지를 받지 않았다.  이후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10년을 더 사시는 동안 청과시장에 한 달도 빼놓지 않으시고 꼬박꼬박 오만 원씩 용돈을 받으러 오셨다. 그러면 나는 점심도 사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놀아드렸다. 아버지는 이 재미에 나를 계속 찾아오신 것 같다.    

  

오백만 원으로 갚은 오만 원     


  작은 시누가 우리 집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백만 원씩 다섯 번 빌려가고 얼마 안 있다 갑자기 혈압으로 쓰러져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세월이 흘러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작은 시누 남편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 돈 나올 데가 있는데 그 돈 나오면 처남댁 돈 꼭 갚을게요. 오백만 원 부쳐 드릴 테니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전화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애기 하나 낳고 신랑이 술장사 한다고 돈 빌려오라고 할 때 친정 가서 어머니에게 돈 못 빌리고 작은 시누에게 가서 돈 빌린 것이 생각났다. 그때 작은 시누는 ‘형님아, 여기 있어.’ 하면서 돈 오만 원을 얼른 빌려주었다. 그 돈은 신랑이 동업한다는 친구를 줘버려 십원도 못 받긴 했지만 그 생각이 나서 시누 남편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아직 그 오만 원을 갚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 돈을 받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마음만 받을게요.”

시누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오백만 원으로 오만 원을 갚았다. 나는 이렇게 오만 원 빌려다 쓰고 오백만 원을 갚는데 나한테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십원도 안 갚는지 모르겠다.      


손 벌리는 친척들     


  배다른 막내 시동생이 결혼해서 서울에 사는데 돈이 없어 지하방을 얻어 이사하다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을 했다.

“형수님, 돈이 없어서 퇴원을 못하고 있어요. 병원에 오래 있으면 병원비만 더 나오니 빨리 와서 병원에서 꺼내 주세요.”

이렇게 시동생한테 전화가 빗발치듯 와 장사도 할 수가 없었다. 과일 장사는 하루라도 쉬면 과일이 썩어 손해가 큰데 하도 괴로워서 하루 날을 잡아 장사를 하지 않고 서울에 가 치료비를 물어주고 왔다.


  그런데 또 얼마 안 있다가 돈 빌리러 우리 집에 와서는 돈 나올 때까지 살 살면서 돌아 가질 않았다. 그때 돈 천만 원이면 논 한배미를 사고도 남는 돈인데 자꾸 그 돈을 빌려 달라고 졸라댔다. 시동생과 함께 옆집 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옆집 사람 돈을 빌려 주었다. 차용증을 쓰면서 이자를 시동생이 다달이 부쳐 주기로 각서도 썼다. 그런데 두 달 이자 돈을 부쳐 주더니 다시는 이자도 원금도 주지 않았다. 그 돈을 내가 다 갚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놓고서는 그 후로 다시는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시아버지께서 젊은 각시를 데려와 살았다. 그 여자는 아기를 못 낳아서 이혼을 당했는데 시아버지와 살면서 내 셋째 딸보다 어린 딸을 낳았다. 그 여자는 딸을 낳은 후로 늙은 신랑하고 살기 싫어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그 후 우리 시아버지는 상심이 크셔서 병이 나 돌아가셨다. 그 여자는 혼자 애기 데리고 살기가 힘드니 은근슬쩍 안면이 있던 나를 찾아왔다.

“애기를 데리고 먹고 살려니 힘들어서요. 식당을 차려서 장사를 해 볼까 해요. 칠백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

이 여자도 내가 돈이 없다고 하니 집에 가지도 않고 우리 집에서 계속 살았다. 할 수 없이 돈 백만 원 챙겨주면서 차비하라고 하고 사정해서 보냈다. 


  이 사람들 말고도 나에게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 떼이고 갚느라 정작 우리 식구들은 외식 한번 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집안 친척들이 다들 내가 돈으로만 보이는지 정말 생각하면 살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니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너무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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