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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Oct 01. 2021

47년생 엄마 #15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6장 돈돈돈(36~41세)     


청과시장에서 자리를 잡다     


 꼭 십 년 동안 애기들을 업고 리어카로 장사를 했지만 아들을 낳고 나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유를 먹여 키웠더니 무거워서 도저히 아기 업고 리어카를 끌 수가 없어서였다. 그때부터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그런데 원래 터를 잡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자기네 자리라며 내쫓았다. 쫓겨가다 보니 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 청과시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곳에서 물건을 팔아도 사람들이 자꾸 내 자리로 찾아와 좋은 자리에 있는 장사꾼들보다 물건을 더 잘 팔았다.

 

  물건을 이것저것 사서 구색을 맞추어 놓으니 리어카로 물건 싣고 나가 파는 것보다 더 장사도 잘 되고 힘도 덜 들었다. 진작 청과시장에서 장사를 했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몰라서 십 년이나 애기 업고 다니며 리어카 장사를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 눈을 뜨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상 이치를 모르면 고생만 하며 사는구나’

이것을 깨닫고 너무 기뻐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하느님, 십 년 동안 리어카 장사하면서 고생 정말 많이 했는데 건강한 아들도 주시고 이렇게 편안하게 돈 버는 방법을 알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청과시장 마당에서 물건을 팔아도 유난히 다른 장사꾼보다 내가 물건을 잘 파니까 중매인 각시들이 자기네 물건 사서 못 팔고 남는 물건이 있으면 나에게 갖다 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장사하는 동안 우리 아들을 그 각시들이 번갈아가며 봐주었다. 나는 돌아다니지 않아 편하고 아들도 내 등에만 매달려 있지 않고 사람들 손에서 지내니 낯갈이도 안 했다. 청과시장에 앉아 편하게 장사하게 된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고마울 데가 없었다.      

죽성동 청과시장에서 자리를 잡다(1989)


건축 사기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장사 끝내고 친정집에 좀 들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놨다.

“성당에서 만난 건축업자 신여사 알지? 그 여자에게 빌려간 돈이랑 이자를 안 주냐고 그랬더니 돈이 없으니까 벌어서 준대. 그러면서 돈을 벌려면 집을 지어 팔아야 한대. 내가 땅을 대고 그 여자는 자재를 대서 집을 짓는다는데 어쩌면 좋을까?”

신여사라는 사람이 말한 제안에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꽤 진지했다. 나는 어머니가 지난번 집이랑 땅 팔 때 형부에게 사례금도 주지 않은 일과 나에게 집터를 비싸게 판 것이 떠올랐다. 어머니 일에 발을 깊숙히 넣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알아서 해야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도 않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어머니가 계속 건물 신축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보니 신여사 에 아예 넘어간 것 같았다.

“일단 논이었던 수송동 땅을 메워야 집을 지을 수 있다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땅 돋울 흙을 어디서 구해야 하냐며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라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봐 알려드리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어머니 일을 자세히 말했다.

“시청에 가면 쓰레기 처리하는 부서가 있는데 거기에 부탁하면 금방 땅 메워준다던데.”

“그러면 당신이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씀드리고 시청 가서 신고 좀 해 줘요.”

어머니가 하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니 남편에게 살짝 도와달라고 말해두었다. 남편이 시청 쓰레기 처리 부서에 가서 신청했더니 연탄재를 갖다 주어 땅을 금방 메워 주었다. 


  어머니는 신여사를 만나 땅을 주면서 집을 지어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했다. 신여사는 시청에서 집 짓는 허가를 받았다. 그 집이 지금 수송동에 있는 총 33세대 삼층짜리 지산 연립이다. 집을 짓는 데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집이 지어지면 한 칸씩 주기로 하고 조합원을 모집했다. 의붓아버지는 그 많은 조합원 중에 조합장이었다. 시청에 조합원 연립을 짓는다고 서류와 돈을 제출하면 시에서 건축비로 돈을 일차, 이차, 삼차로 건축업자에게 넣어주었다. 건축업자는 집을 지어주고 그 이익금을 갖는 건데 신여사와 관련된 건축업자가 건물을 일부 지어 놓고 시청에서 이차로 부쳐 준 돈을 찾아 가지고 도망을 가 버렸다. 


  건축업자는 잡히지도 않고 연립주택 건물은 흉물스럽게 일 년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 두 해 쯤지나 시에서 다른 업자에게 건축을 맡겨 겨우 마무리를 했다. 의붓아버지는 시에서 땅 값으로 연립주택 다섯 칸을 받았다. 또 연립주택 옆에 단독주택 다섯채도 함께 짓고 있었는데 단독주택까지 의붓아버지가 받은 주택은 모두 열 채였다. 어머니는 이 일에 아주 질려서 한 채에 500만 원씩 받고 모두 5000만 원에 팔아버렸다. 


  그때 막 둘째 동생이 결혼을 해서 어머니는 그 5000만 원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전셋집을 얻고 학원을 차려주었다.

“어머니, 그 많은 돈을 어째서 둘째 동생만 다 주고 큰 동생한테는 아무것도 안 줍니까? 큰 동생은 아무것도 없이 분가했었잖아요. 큰 동생한테도 다만 천만 원짜리 전셋집이라도 얻어 주지 그랬어요. 큰 동생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어머니는 힘이 하나도 없이 내 말에 대꾸를 했다.

“서울에 가보니 돈 오천만 원은 돈도 아니더라. 돈이 모자라 겨우 끼워 맞추고 왔다. 큰 아들 몫은 따로 있고 이 땅은 작은 아들 몫이니 작은 아들에게 다 줘야 맞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 길로 아프기 시작했다.      


친아버지 상     


  그해 겨울 몹시 추운 날 청송에서 전보가 왔다. 친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부리나케 서둘러 언니와 함께 친아버지가 사셨던 청송 도평 유신이라는 산골짜기 동네를 찾아갔다. 동짓달 25일에 돌아가셨는데 날이 정말 추웠다. 친아버지는 둘째 작은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셨는데 둘째 작은아버지가 어떤 여자 한 분 데려다가 친아버지와 함께 살게 해 놓고는 모두 안산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 뒤 아버지는 둘째 작은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그 여자와 농사를 지으면서 남매를 낳고 몇 년간은 잘 살았다고 했다. 큰애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다. 그런데 애들 엄마가 아들이 네 살 때쯤 집을 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그 여자는 친정도 없고 밑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집 나간 후로 아무도 그 여자를 본 사람도 없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아 어쩔 수 없이 편찮으신 친아버지가 두 남매를 어렵게 키웠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상 치르러 갔을 때 큰딸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돈 벌러 갔고 남동생은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 아예 거동을 못 하셔서 오촌 아제네가 아버지를 모셔다 같이 살았다고 했다. 오촌 아제에게  친아버지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너희 아버지는 일본 사람들한테 너무 고문을 많이 당해서 몸속에 열기가 들었는지 날씨가 그렇게 추운 날에도 옷을 벗고 다녔어. 며칠 전 밤에 한 데에 있다가 얼어 죽었어.”

친아버지의 돌아가신 사연을 들을 때 정말 나라가 원망스러웠다. 어린 이복동생들을 보면서 우리도 부모 못 만나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동생들도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친아버지 초상을 다 치르고 나니 서울에 돈 벌러 갔던 여자 동생이 내려왔다. 그 애는 처음 보는 나에게 바짝 매달리며 애원했다.

“언니, 나 언니 따라가서 살면 안 돼? 나 언니네 집에 가서 살 거야.”

그 애는 내가 집을 나서려고 하자 막무가내로 따라왔다. 할 수 없이 이복 여동생을 데리고 군산에 왔다. 언니네 집에는 남자 조카만 세 명이니 딸이 많은 우리 집에 그 애를 데려다 두었다. 여동생은 첫째 딸보다 한 살이 어리다. 이모가 조카보다 어리니 조카인 딸이 이모 옷도 다 빨아주고 그랬다. 이복 여동생은 우리 집에 살면서 낮에는 합판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고판남이 운영하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이복 여동생을 보고는 물었다.

“쟤는 누구냐?”

“아버지 딸이에요.”

어머니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저 애를 당장 내보내라고 호통을 쳤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저 애를 여기에 데려다 놓냐? 당장 내보내!”

“....”

“내 며느리가 보면 그런 창피가 어디 있냐?”

어머니는 한바탕 호통을 치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내가 없는 사이에 우리 집에 와서 이복 여동생에게 여기는 네가 살 데가 아니니, 빨리 너 살던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이복 여동생은 어머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리 쫓아내도 언니가 가라고 안 하면 안 갈 거라며 우리 집에서 버텼다. 원래 살던 동네로 가면 사촌도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애가 내가 핏줄이라며 나를 믿고 따라왔으니 나라도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이 어머니가 왔다 갔다고 말하면 나는 어머니에게 들볶임 당하는 이복 여동생을 달래주었다.

“네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오갈 데도 없는데 너를 어떻게 가라고 할 수가 있겠어. 지금 좀 힘들어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참고 같이 살아보자.”

어머니는 며느리 보기에 민망하다며 여동생을 자꾸 내보내라고 나를 채근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안 간다는 애를 강제로 보낼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가 그 애를 안 보고 살면 되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맘 상하실까 봐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어머니가 저질러 놓은 일인데 어머니 체면만 앞세우는 것이 싫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돈 안 벌어다 주는 남편하고 사는데 자식들이 고생할까 봐, 또 다른 사람들에게 눈칫밥 먹을까 봐 안간힘을 다해 버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본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 시집을 가는 바람에 내가 의붓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도 나처럼 참고 살았으면 지금 이런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인데도 어머니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우리 집에 와서 동생을 내보내라고 호통을 다. 


  또 어머니 수중에 있는 돈은 둘째 아들에게 다 줘버리고는 바라는 것은 은근히 말을 돌려 이야기했다.

“내 친구는 딸이 금반지랑 금팔찌를 해왔다더라.”

어머니가 하도 친구를 부러워하시기에 금반지랑 금비녀를  드렸다. 어머니에게 해 드린 것은 이게 끝이 아니다. 의붓아버지는 성미가 별나서 화가 났다 하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진다. 친정에 가보면 장롱, 찬장 등 살림살이를 의붓아버지가 다 부숴놔 그런 살림살이도 새로 사다 드렸다. 이것 말고도 어머니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렸는데 어머니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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