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Sep 29. 2021

47년생 엄마 #10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5장 군산에서 다시 시작(24~35세)     


성금 만원     


  하루는 아침 여덟 시부터 배추하고 무를 한 리어카 싣고 군산 시내를 다 돌아다녔지만 한 포기도 팔지 못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안 팔릴까.’

너무 속상해서 속으로 울고 있는데 등에 업힌 둘째 딸은 오줌을 쌌다. 그게 내 다리를 타고 내려와 신발 속으로 다 들어갔다. 고무신 속에 오줌이 들어가니 리어카를 밀 때 신발이 자꾸 미끄러져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길이 잘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아기까지 업고 물건이 잔뜩 실린 리어카를 밀기는 너무 힘에 부쳤다. 


  그때가 오후 세시쯤 되었는데 아기한테 젖도 주지 않았으니 아기도 배가 고파 울기 시작했다. 나도 하루 종일 리어카 끌면서 ‘배추 사세요!’하고 소리 질렀더니 배가 고팠다. 그 자리에 아기를 내려 안고 젖을 물리면서 눈을 감았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를 등에 하나만 지고 가셨는데 나에게는 왜 앞뒤에 무거운 십자가를 주셔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앉아서 눈을 감고 한참 울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이 배추 한 포기 얼마요?”

반가운 소리에 얼른 눈을 뜨고 말했다.

“아주머니, 싸게 드릴게요.”

그때는 누가 달라면 거저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주머니에게 배추를 몽땅 담아주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많이 드렸어요.”

옆에 함께 온 사람이 그걸 보고 자기도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서로들 달라고 해 그 자리에서 배추, 무를 다 팔았다. 내가 팔던 자리가 삼학동이었는데 삼학동을 지나면 유가꼬 시장이 있다. 사람들이 시장가는 길초에서 배추를 싸게 파니까 저녁거리 사러 나왔다가 다들 내 배추를 사간 것이다. 다음에도 이 시간에 여기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즘 살기 바빠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하느님이 나를 잘 도와주지 않는가 보다. 하느님께 가서 약속을 해야겠다.’

그날 배추 판 돈을 몽땅 들고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이 돈을 바칠 테니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돈이 없어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일을 잘 지키게 해 주시고 매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 앞에 성금 만원씩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 기도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군산에서 처음 다니던 둔율동 성당(출처: 위키백과)


  그 이후로 장사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일요일에는 성당에 갔고 꼭 만원씩 성금을 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는데 쌀값이 한 되 80원, 한 말에 800원이었다. 만원을 벌려면 일주일 동안 벌어도 힘든 시절이었다. 주일마다 그렇게 큰돈을 내는 일은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지 하고 만원씩 내는 것을 꾸준히 지켰다. 그러다 보니 물건을 많이 사서 팔아도 참 잘 팔리고 장사하는 게 차츰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드디어 전세 오만 원짜리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언니는 기뻐하면서 쌀 닷 되를 싸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언닌데, 너 이사하는데 쌀이라도 사 주어야지.”

“못난 동생 오갈 데 없을 때 일 년 넘게 거두어 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마워. 이게 다 언니 덕분이야.”

이렇게 말하며 언니 손을 잡고 울었다.

“그래, 우리 앞으로 잘 살아보자.”

언니도 이렇게 대답하면서 내 손을 잡고 울었다.

     

더 이상 헤어지지 말자     


  이사하고 얼마 안 있다가 친정엄마가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나도 너 따라와서 여기서 살아야겠다.”

어머니 말씀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여기 와서 무얼 해서 먹고살려고요?”

“그냥 해 본 소리다.”

어머니 사시는 것이 생각보다 별로 안 좋으신가 보다 하고 생각이 들면서도 내 코가 석자니 더 이상 여쭤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어머니가 큰딸 이야기를 꺼내셨다.

“너 첫째는 어떡할래? 일화가 지금 큰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데 고모네 애들이 나가면서 이쁘다고 머리를 쥐어박고 집에 들어오면 또 이쁘다면서 쥐어박고 해서 머리가 다 헐었다더라.”

첫째가 힘들게 지내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다.

“첫째는 지금 큰 시누가 데려다 키우고 있어. 큰 시누는 아이들이 커서 일하러 다니려고 했는데 네 딸 때문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 겨우 얻은 일이 대구 상지 전문 대학교 식당에서 밥해주는 일 이래. 큰 시누가 아침에 걔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면 식당 담당 수녀님이 큰 시누가 일 끝날 때까지 아이를 봐준다더라. 수녀님이 애를 그렇게 이뻐하면서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기도 하고 애를 잘 봐준대. 다섯 살 밖에 안 먹은 어린애가 엄마 없이 고모 집에서 지내니 불쌍하다면서 잘해 주신대.”

나도 어릴 때 성당 수녀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부모님을 설득해 성당도 다니게 해 주시고 성당 다니면서부터 의붓아버지한테 매를 맞지 않게 되었다. 첫째를 잘 돌봐주시는 수녀님이 너무 고맙고 하느님이 우리 모녀를 보살펴 주시나 보다 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낮에 수녀님이 잘 보살펴 주시는데 집에만 오면 사촌들이 이쁘다면서 머리를 쥐어박으니 아이 머리가 다 헐었대. 동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내가 성당에만 가면 아이 불쌍하니까 친정엄마가 좀 데려다 키우라고 그러는구나. 너는 어떡하면 좋겠니?”

첫째가 불쌍하긴 했지만 지금은 내가 하루 종일 장사를 하니 여기에 데려와 키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보다시피 내가 장사하느라 새벽에 나가면 저녁 늦게 집에 오니 아이를 데려다 키울 수가 없어요. 내가 돈을 보내 드릴 테니 좀 봐주세요.”

“그래, 알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시고는 집에 돌아가셔서 첫째를 친정집에 데려다 놓고 돌봐주셨다.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우니 사위가 가끔씩 아기 보고 싶다면서 처갓집에 들른다고 했다. 나는 절대로 남편이 처갓집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시누가 형부하고 친척이다 보니 시누가 형부한테 전화하고 편지도 써서 우리 부부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형부가 나를 불러 놓고 타일렀다.

“처제, 처제도 애기가 둘이잖아. 애들 봐서라도 김서방을 오라고 해. 내가 김서방 오면 좋은데 취직시켜 줄게.”

“형부, 나는 나 혼자 살았으면 살았지 김서방 하고는 절대로 살지 않을 테니 빈말이라도 김서방 말은 꺼내지 마세요.”

형부가 말도 못 꺼내게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어머니가 큰딸을 데려오라고도 안 했는데 우리 집에 데려왔다. 애기가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는지 사람만 보면 구석에 숨어서 아예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딸을 볼 때 내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도 다섯 살 때 의붓아버지 만나 눈치 보며 살던 것이 생각났다.

‘아, 내 딸도 부모 못 만나 다섯 살에 저렇게 눈치를 보고 살았구나. 첫째야. 정말 미안해.’

내가 엄마가 되니 우리 친정 엄마 마음도 이해가 됐다. 내가 클 때 친정엄마한테 나 데리고 시집와서 나만 고생시킨다고 행패 부린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엄마한테 너무해서 지금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에 밥해 먹고 딸이 자는 모습을 쳐다보면 눈물이 났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찌 내 팔자를 내 딸한테도 물려주셨는지.... 하느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누구에게 한탄할 데도 없어 하느님한테 한탄하면서 울고 또 기도했다.

‘하느님, 앞으로는 절대로 이 아이와 헤어지지 않고 잘 살게 해 주세요.’      

 

남편의 취직자리      


  큰 딸과 함께 살면서 눈치도 주지 않고 이뻐해 주면서 자꾸 사랑해주니 점차 눈치 보는 것이 없어졌다. 그런데 형부는 나만 보면 자꾸 볶아 댔다.

“김서방 오라고 할까?”

형부가 하도 볶아대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한마디 했더니 진짜로 남편이 군산에 왔다. 남편 얼굴을 보니 나를 힘들게 한 게 생각나 화가 치밀었다. 내가 남편 꼴도 보기 싫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더니 남편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제, 내가 김서방 오면 좋은데 취직을 시켜 줄게. 오라고 해.”

형부는 그 이후로도 계속 나를 꼬드겼다.

“그럼 그 사람 자기 밥벌이라도 할 수 있는 곳에 취직시켜 주려면 오라고 하세요. 김서방이 또 술이나 먹고 자기 식구들 나 몰라라 하면 어떡해요. 형부가 그거 책임지려면 오라고 하세요.”

“그래, 내가 책임지고 취직시켜 줄 테니 걱정 마. 이제 김서방 오라고 한다.”

형부는 이렇게 나에게 허락을 받고 남편을 군산에 오라고 했다. 정말로 그 사람이 보기 싫었지만 애기가 둘이나 되니 애들을 봐서 그냥 받아주었다. 


  형부가 처음 취직시켜준 자리는 조개잡이 배였다. 배가 바다에 한번 나가면 15일이 지나야 집에 왔다. 보름 만에 집에 왔길래 남편을 마주하고 물었다.

“배에서 일하니 할 만하던가요?”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서 그런지 배 멀미가 나서 엄청 고생했네. 그래도 한번 해 봐야지.”

“배에서 무슨 일을 해요?”

“처음 배를 타니 뱃일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내가 밥 담당이야. 고기 잡은 것 회쳐서 먹기도 하고 찌개도 끓이는데 혹시 고추장 있나?”

“네. 배 타러 갈 때 고추장 한 독 담아줄게요.”


  고추장을 가지고 배 타러 간지 보름 만에 다시 와서 남편은 배를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했다.

“왜 배 타러 안 가는데요?”

“도저히 배 멀미가 나서 배를 탈 수가 없으니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어.”

남편 말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했다. 형부를 찾아가 신세한탄을 했다.

“형부, 신랑이 배 타러 안 간대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이제 어쩔 셈이에요?”

형부는 내 말을 듣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또 다른데 일자리를 알아볼 테니 처제는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그러더니 얼마 안 가 해망동 배 공장에다 취직시켜 주었다. 배 공장에서 얼마쯤 일하다가 배가 다 만들어져 할 일이 없다고 했다. 배 공장에 다니던 인부들은 모두 떠나 집 짓는 데서 일한다고 했다. 남편도 집 짓는 곳에 다니려면 공구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톱, 망치, 대패 등 모든 공구를 사 주었다. 그런데 곧 겨울이 닥치니 집 짓는 일거리도 없다면서 집에서 놀았다.

 

  남편이 집에서 놀고 있으니 형부는 똥 푸는 일을 소개해주었다. 내가 그 일을 해 보라고 했더니 되레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똥까지 퍼야 해?”

겨울이 되어도 청과물 장사는 할 수 있으니 남편에게 애기를 보라고 하고 나는 장사를 했다. 결국 남편은 우리 집에 취직이 된 것이다.      


이전 09화 47년생 엄마 #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