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가 만사
어제 저녁, 회사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전 직장 팬클럽 후배에게 카톡이 왔습니다다.
“선배 지금 통화 가능?”
카톡만으로도 후배가 힘든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답변을 했습니다.
“무슨 일?”
대화 내용은 결국 승진과 관련된 인사 이야기였습니다.
요약하자면 부서 내 선임 심사역 자리 3곳이 생겼고 경력, 퍼포먼스, 학력 등을 종합해 봤을 때 후배가 그 자리에 떨어질 수 없는데도 낙마했다는 것.
그래서 기운 빠지고 슬퍼하고 있다는 거.
어떤 위로를 해줄까 고민하다 후배 대신 선임 심사역에 올라간 사람들을 확인하고 위로를 멈췄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제가 회사를 그만두던 시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죠.

화가 난 이유는 승진 대상으로 지목된 3명 때문이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A 심사역은 같이 근무한 결과 본업인 심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
나이는 많지만 직급은 낮은 인물이었는데 전형적인 ‘접대형/정치형’ 인간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높은 사람들과의 술자리와 주말 골프 약속 잡는 것이 일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한 사람.
문제는 윗 사람들이 이 친구를 좋아한다는 거였는데 업무 능력은 정말 심각하지만 (별명: 자판기) 술 먹어주고 골프쳐주니 인사고과를 잘 받는다는 거였죠.
더 심각한 건 A 심사역을 보면서 막 부서에 전입한 친구들이 ‘여기서 성공하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특히 경계했는데 멘토링을 담당했던 후배들의 경우 그런 낌새가 보이면 가차없이 야단쳤기 때문에 A 심사역의 뒤를 쫓는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던 듯 합니다.

2. B 심사역은 전입 후 부동산 금융만 전담했는데, 업무를 잘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는 고위 임원과 동향 사람.
한 분야에만 오래 있었다는 점이 걸렸는데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부서에서 스카웃 제의를 할만큼 매력적이지 않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B 심사역에 대한 저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고 느낀 건 외부 의뢰받은 강의를 통해서였습니다.
말 그대로 강의 내용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죠.
강의를 주선한 대표는 B 심사역의 강의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나 원참, 앞으로는 당신이 이쪽도 커버하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B 심사역 강의로 반사 이익을 (?) 누린 저였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3. C 심사역은 선배였는데, 심사역은 늦게 시작한 인물로 이 사람은 앞 두사람에 비해서 처음에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평판도 나쁘지 않았던 듯.
문제는 이 사람 출신학교가 회사에서 파벌을 조장하는 모 대학교라는 거. (오해 마시라. 여러분이 생각하는 SKY 아님. 네임밸류 떨어지는 학교라 밝히기도 두려움)
그래서인지 아는 사람이 많았고 흘러 나오는 이야기가 늘 그렇듯 좋은 이야기 뿐이었다.
더구나 승진에 욕심이 생긴 C 심사역은 부서 최악의 친일파라고 불리는 F 팀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시작하면서 A 심사역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거기서부터 그 친구의 발전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명의 인물 평가를 간단히 마치고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끼는 후배는 파이터 기질을 가진 녀석입니다.
그러니 윗 사람들이 좋아할리가 없다.
예전의 저와 닮았다고 하는데 기분 나쁩니다. 저보다 더 못 생겼거든요.

그런데 연차가 쌓이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부서내에서 이 친구의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습니다.
꼬치꼬치 따지는 게 꼴보기 싫지만, 심사부서에서는 이런 사람이 한명쯤은 꼭 필요한 법.
그런데 주요 보직을 주자니 이 친구의 등에 날개를 달아줄 것 같다고 경계한 사람들이 계략을 (?) 꾸민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나 과거의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따뜻한 위로를 해줄까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고 조금 쓴소리지만 도움이 되라는 의미에서 후배에게 말했다.
“지금 너의 역량이라면 어디서도 한 사람 몫 이상은 한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조직이나 사람 밑에서 일해야 빛이 나는거야. 빛이 나고 싶다면 새롭게 도전해봐. 그게 두렵다면 지금의 모멸감을 버티고 있어라.”
더 긴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여기까지로 하고…
‘인사가 만사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치과신문 편집인 칼럼]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dentalnews.or.kr)
10명의 승진자를 뽑을 때 9명까지는 윗분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선발한다 하더라도, 단 1명은 실력자를 뽑으면 그 조직은 그래도 살아 돌아간다고 봅니다.
20%의 천재가 80%의 일반인들을 끌고 가는 거니까.
그런데 그 1명 마저도 실력이 아닌 학연, 지연, 혈연으로 뽑게 되면 조직의 미래는 뻔한겁니다.
쉽사리 망가지는 것.
[단독] 학연·지연은 없었다…사람만 본 국민은행 'AI 인사부장님' | 서울경제 (sedaily.com)
참고로 전 회사를 떠나온 지 이제 반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가끔씩 심사 건에 대해서 문의를 해오는 지점장들이 있습니다.
“난 더이상 그쪽 심사역이 아니라구요”
아무리 말을 해도 이 분들이 하는 말은 이렇다.
“단지 니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전화한거야. 요새는 심사부서에 전화해도 물어볼 것이 없어. 다들 바쁘다고 하는데 실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
신기한 것이 떠난 조직이 잘 나가면 배 아플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조직이 망가지는 걸 눈으로 보는 거였다는 걸 요새 참 많이 느낍니다.
참고로 한국 양궁이 왜 세계적인 경쟁력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너무나도 공정한 절차에 의해 국가대표를 선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실력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잘 지켜지기 때문이죠.
‘불안해도 원칙을 깰 수는 없다’…한국 양궁 신화의 비결 | KBS 뉴스
사랑하는 후배가 지금의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