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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소빈 Oct 26. 2024

9모 후기

1교시 국어 영역

(글을 시작하기 전에.

혹시 이 글의 제목을 보고 내가 지금이 몇월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오늘이 10월 26일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있고, 9월 모의고사가 끝난 지 오래인데다 10월 모의고사까지 치고난 시점이라는 것까지 다 알고있다.

그저 9월 모의고사를 친 직후부터 이 글의 대략적인 틀을 구상하기 시작했으나 그 즘 중간고사 기간에 돌입한 나머지 글을 다듬고 업로드하는 것이 좀 미뤄져버린 것뿐이다. 이를 감안하고 글을 읽어주시길!

글에 대한 피드백이나 이 주제에 대한 지식 공유, 개인적인 견해까지 모두 대환영이다.)


/



내 이름을 OMR카드에 옮겨적으면, 웃고 있는 얼굴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듯한 모양이 된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계속 그리 보여서 눈에 밟힌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남몰래 울고있는 것 같은 그 이름.

퍽 안쓰럽다.


나는 내 이름을 위로하듯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다.

눈물을 닦아내듯 'ㅣ' 위에 찍힌 검은 점을 살짝 가려보았다.


ㅁㅗㄱㅅㅗㅂ●


애써 눈물을 감추고 보니, 나의 이름은 '불완전한 미소를 띤 불완전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의 이름이기에, 나는 눈물을 억누르던 손가락을 치워버리고 맺힌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기로 했다.

나의 답안지 위를 덮은 시험지 조각은 사용하고 난 젖은 손수건처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이름란에서 한참을 머물던 펜촉 끝은 드디어 필적 확인란 쪽으로 움직인다.





'맑아진 마음으로 그윽하기를-'


필적 확인란에 나의 글씨체로 적힌 그 글귀, 박노해 시인의 문장이었던 그 글귀는 어느새 나의 문장이 되어서  이름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다. 아늑하고 고요한 단어로, 나직이 파문을 일으키며.


'맑아진 마음으로 그윽하기를.'


스물여섯 명의 학생들이 만드는 숨소리의 화음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그 문장을 몇번이고 되뇌였다.


-♬-


이윽고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낭랑하게 퍼져나가 공간을 메웠다. 이 소리를 들을 적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이 소리는 시험 전 긴장감이 맴도는 무거운 적막에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해맑다.

아무도 음악으로 여겨주지 않는, 서글픈 발랄함을 띠는 노래 한 소절.

그 끝마저 분주하게 문제지 표지를 넘기는 소리가 다급히 뒤따라와 뭉개 버렸고,


시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모의고사에서 가장 기다리는 시간인 1교시 국어 시간. 이번에는 어떤 내용의 지문이 나올지 기대하며 문제들을 빠르게 훑듯이 읽어내려갔다. 지문들을 빠르게 읽어나감과 동시에 내용 파악의 정확성을 유지하는 게 국어 모의고사의 핵심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번, 2번, 3번... 15번 문제를 빠르게 넘어와 이윽고 16번 문제에 도달했다.


그 지문은 철학자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삶과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서술한 것이었는데, 예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있던 나에게는 꽤나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현존재'라 칭했다. 또한 인간은 단순히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존재는 사회의 체제에 따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삶이 아닌 세상이 시키는 삶을 살게 되기도 하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본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세인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세인의 삶에서 해방되어 다시 현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단순히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주장한 바람직한 삶의 태도였다.


그의 주장을 주욱 읽어내려가면서 속으로, 나는 과연 현존재로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세인이 되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런데, 완전한 현존재로서, 또는 완전한 세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둘 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특성상 타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자신의 주관과 의식을 모두 버린 채 살아가는 일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존재와 세인, 둘이 섞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고 불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반면, 사르트르는 인생은 하나의 긴 기대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속마음을 들킨 것같아 괜히 뜨끔했다. 그렇다. 평생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하길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그 누가 '인생이 하나의 긴 기대'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대를 넘어 다시 기대하고, 또 기대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다시 기대를 품는 '인간'이라면 말이다.


우리에겐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미래를 향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자유는 죽음 앞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죽음은 나의 기대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죽고나면 나의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오로지 타인만이 나의 죽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한 바로는 죽음이란 건 나라는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는 일부도 아니라는 뜻이다.


음, 상당히 타자중심적인 견해이다.

그런 연유로 이 주장은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주장은 죽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떠나보낸 이에겐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방금 전 말했듯이, 누군가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사망한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이기 때문에, 고인의 죽음을 기리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인과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게 됨으로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그는 죽음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지금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자유에 따라 선택을 한 후, 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중 누구의 주장에 공감하는가?


사실 완전하게 하이데거가 옳다, 혹은 사르트르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다- 라고 단정짓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당장 나부터도, 이성은 '죽음을 직시하라!'고 외치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좇는 듯 하지만,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죽음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타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자들의 일원이 되고싶은 마음이 일어 쉽사리 내 의견을 표명하기 어려웠다.


죽음, 모두가 겪어야만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가 없는 아이러니한 것.

언제 찾아올지 몰라 불안한 것.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피해가고 싶은 것.

나이 든 사람 어린 사람 가리지 않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매정한 것.


우리가 떠올리는 죽음의 얼굴은 잔인하고 매정하고 삭막하다.

똑바로 마주보기에 불편하고 외면하고픈 어색한 얼굴.

그러나 죽음을 외면하기만 해서는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리고 있다."

-몽테뉴


몽테뉴의 말대로 너무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삶과 죽음을 망치지 않도록하는 적당한 선에서, 우리 생애의 본질에 대해 깊게 사고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조심스럽게 제안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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