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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사원철학자 Oct 28. 2024

도시 산책 도전

추억을 남기다

오늘은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콘서트를 손꼽아 기다리던 아내를 보니 기꺼이 보내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아내가 없는 6시간을 집에서 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금세 칭얼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유모차를 끌고 도시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같은 전철 플랫폼에서 서로 반대 방향의 전철을 탔습니다. 우리가 탈 전철이 먼저 도착했어요. 10호차 유모차 전용 공간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아내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도쿄 이케부쿠로로 향했습니다.


아내와 추억이 가득 담긴 이케부쿠로에 아이와 단둘이 오게 되다니! 잠시 아내와의 이별로 인한 외로움은 잊고, 아이와의 짧은 도시 투어 계획을 마음속으로 그려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장소는 바로 미나미이케부쿠로 공원! 아내와 함께한 풋풋했던 대학원 시절, 날씨 좋은 날 공강 시간에 잔디밭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전철에서 내려 공원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유모차 때문에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 대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 평소 같으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20분 넘게 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 시절의 여유로움을 상상하며 도착했지만, 공원 입구에 유모차들이 빼곡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죠.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람 없는 공간을 찾아 아이와 둘만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아이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지나 대학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찾던 준쿠도 서점에 도착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들어가는 게 조금 망설여졌지만, 오랜만에 철학과 사상 서적을 보고 싶은 마음에 책 냄새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섰습니다. 서점 입구에 한강 작가의 번역본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며 4층 사상/철학 코너로 올라갔습니다. 역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이죠.


이타주의, 칸트의 판단력 비판 등 요즘 유행하는 서적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조용한 서점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퍼지기 전에 급히 아이를 안아 진정시켰습니다. 감색 침받이와 빨간 양말을 신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당황했던 순간도 잊을 정도였죠.


책을 꺼내 읽는 저를 지켜보던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세상의 그 어떤 지혜보다도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일본의 최신 서적들을 구경한 뒤 다시 집으로 향했습니다. 많은 사람과 차량을 지나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오르자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아이와 둘만의 추억을 도쿄의 북쪽 거리 곳곳에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오겠지만,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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