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의 심리학,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마음의 서러움
회사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 중 하나가 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그 말은 위로 같지만,
결국 받아들이라는 명령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이 싫었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배웠고,
노력은 반드시 보상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믿음을 여러 번 부숴놓았다.
성과를 냈는데도 인정받지 못한 적이 있다.
내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억울함보다도 허무함이 먼저 찾아왔다.
회사 안에서 ‘공정함’은 늘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공정한 결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별로 느껴진다.
그 기준은 명확하지 않고, 감정이 그 간극을 더 크게 만든다.
나는 한때 ‘공정함’을 너무 신성시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숫자처럼 균등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공정성은 ‘인지된 공정성’이다.
즉, 실제로 공정하냐 보다 ‘공정하다고 느끼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 감정의 차이가 조직 내 갈등의 대부분을 만든다.
한 회의 자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모두가 동의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팀장은 나만 따로 지적했다.
그 순간 ‘내가 미움받는 걸까’라는 생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팀장은 나를 미워한 게 아니었다.
단지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왜 나만’이라는 억울함 속에 갇혀 있었다.
공정함을 바라보는 시선은 감정의 렌즈를 통해 굴절된다.
내가 힘들수록 세상은 더 불공평하게 보인다.
결국 불공정의 감정은 타인보다 나 자신을 더 괴롭힌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왜 이건 불공평하지?”에서 “나는 왜 이렇게 느낄까?”로.
그 질문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공정함을 향한 분노 뒤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다.
그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단지, 그 인정이 타인의 평가에만 묶일 때 고통이 커지는 것이다.
회사의 보상체계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
성과를 수치로 환산하고, 평가를 등급으로 매긴다.
그 틀 안에서 마음의 무게까지 계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내가 한 일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고,
내 노력을 먼저 알아주는 일이다.
그건 결코 자만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한 방식이다.
이후로 불공평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시스템의 문제지, 내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 구분 하나가 마음을 훨씬 가볍게 만들어준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완벽히 공정한 마음으로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공정 속에서도 무너질 필요는 없다.
그건 내가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회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진짜 공정함은 ‘결과의 균등’이 아니라 ‘기회의 균형’이라는 걸 느낀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살리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불공정한 일은 여전히 많다.
누군가는 운이 좋고,
누군가는 같은 노력을 해도 묻히곤 한다.
하지만 그 차이를 증오하기보다,
내 속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불공정’이라는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 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그때 비로소 마음의 중심이 잡히기 시작한다.
공정의 심리학은 결국 ‘비교의 심리학’이다.
비교를 멈출 때, 불공정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내 방식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이다.
세상은 여전히 완벽히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균형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게 직장인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