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맛집과 미각

인생 최고의 미각

by 노멀휴먼

나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좋게 말하면

모든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이고,

솔직히 말하면

맛없는 음식을 줘도 맛있다고 먹는,

미각이 둔한 사람이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가 미각이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기숙사 생활 중엔 급식을 먹었고,

자취를 하면서는 주로 학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가끔 친구들과 술 마시러 맛집 비슷한 곳에 가기도 했지만,

그때의 초점은 맛이 아니라 술 마시는 분위기였다.


친구가 "거기 음식 괜찮지 않았냐"라고 물으면

맛보다는 술자리의 흥겨운 기억을 떠올리며

"그래, 나쁘지 않았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미각이 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첫 사회생활이 그렇듯,

선배가 밥을 사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가고,

메뉴 선택권을 물어보면

"뭐든 잘 먹습니다"라고 답했다.


동기들과 차이가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뭐든 잘 먹는다는 나의 말은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선배들 사이에서

"얘는 음식 가리는 게 없다"는 평판이 퍼졌고,

나는 몇 달간 즐겁게 얻어먹으며 다녔다.


그러다 동기들이 "그 음식점은 좀 별로 아니었냐?"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음식은 개인별로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호불호가

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 분위기를 느끼며

슬쩍 동의한 적도 있었다.


내 미각이 진짜 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건

대학교 친구들이 서울로 놀러 왔을 때였다.


그들은 맛집을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자신 있게 한 달 전부터 방문하던 백반집을 추천했다.

음식이 나오자 나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지만,

친구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야, 반찬이랑 찌개 정말 예술이지 않냐?"

내 말에 친구들은 단답형 대답만 반복했다.


식사가 끝난 후,

친구들이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너 진짜 맛집이라서 데려온 거야?

국이랑 달걀말이는 너무 짜고, 어묵볶음은 너무 달잖아.

그리고 다른 반찬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그 모든 게 나쁘지 않았으니

조금 억울할 따름이었다.

다만, 몇 달 후 그 음식점이 문을 닫은 것을 보고

억울함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이후로 친구들이 내게

음식점을 고르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출장으로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오면

미리 알아서 예약을 하고는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상황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축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맛있고 맛없는 걸 가리며

식사를 고민할 때,

나는 어떤 음식이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 작은 차이가

삶을 얼마나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지 모른다.


결국, 입맛이란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렌즈일 뿐이다.

내 렌즈가 조금 둔감하더라도,

그로 인해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결코 작지 않다.


삶도 이와 비슷한것 같다.

완벽함보다는 관대함으로,

섬세함보다는 느긋함으로 세상을 대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어쩌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내 미각이

인생에서는 최고의 미각일지도...


오늘도 나는 약간 모자란 내 미각과 함께

맛있는 한 끼의 행복을 감사히 음미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과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