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미각
나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좋게 말하면
모든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이고,
솔직히 말하면
맛없는 음식을 줘도 맛있다고 먹는,
미각이 둔한 사람이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가 미각이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기숙사 생활 중엔 급식을 먹었고,
자취를 하면서는 주로 학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가끔 친구들과 술 마시러 맛집 비슷한 곳에 가기도 했지만,
그때의 초점은 맛이 아니라 술 마시는 분위기였다.
친구가 "거기 음식 괜찮지 않았냐"라고 물으면
맛보다는 술자리의 흥겨운 기억을 떠올리며
"그래, 나쁘지 않았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미각이 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첫 사회생활이 그렇듯,
선배가 밥을 사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따라가고,
메뉴 선택권을 물어보면
"뭐든 잘 먹습니다"라고 답했다.
동기들과 차이가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뭐든 잘 먹는다는 나의 말은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선배들 사이에서
"얘는 음식 가리는 게 없다"는 평판이 퍼졌고,
나는 몇 달간 즐겁게 얻어먹으며 다녔다.
그러다 동기들이 "그 음식점은 좀 별로 아니었냐?"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음식은 개인별로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호불호가
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 분위기를 느끼며
슬쩍 동의한 적도 있었다.
내 미각이 진짜 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건
대학교 친구들이 서울로 놀러 왔을 때였다.
그들은 맛집을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자신 있게 한 달 전부터 방문하던 백반집을 추천했다.
음식이 나오자 나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지만,
친구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야, 반찬이랑 찌개 정말 예술이지 않냐?"
내 말에 친구들은 단답형 대답만 반복했다.
식사가 끝난 후,
친구들이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너 진짜 맛집이라서 데려온 거야?
국이랑 달걀말이는 너무 짜고, 어묵볶음은 너무 달잖아.
그리고 다른 반찬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그 모든 게 나쁘지 않았으니
조금 억울할 따름이었다.
다만, 몇 달 후 그 음식점이 문을 닫은 것을 보고
억울함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이후로 친구들이 내게
음식점을 고르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출장으로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오면
미리 알아서 예약을 하고는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상황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축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맛있고 맛없는 걸 가리며
식사를 고민할 때,
나는 어떤 음식이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 작은 차이가
삶을 얼마나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지 모른다.
결국, 입맛이란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렌즈일 뿐이다.
내 렌즈가 조금 둔감하더라도,
그로 인해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결코 작지 않다.
삶도 이와 비슷한것 같다.
완벽함보다는 관대함으로,
섬세함보다는 느긋함으로 세상을 대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어쩌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내 미각이
인생에서는 최고의 미각일지도...
오늘도 나는 약간 모자란 내 미각과 함께
맛있는 한 끼의 행복을 감사히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