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은 재판의 시큼한 풍경

가장 개인적인 저널리즘 (4) 법정 스케치

by 제리

초여름의 갈색 코트, 정갈한 옷매무새와 부스스한 머리가 눈에 띈다. 일에 찌들어 사는 기업 총수처럼 차려입은 피고인이 법정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착석한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변호인이 마치 충실한 비서처럼 옆에서 몇 가지를 설명한다. 피고인보다 더 긴장한 기색이다. 피고인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하다가 모든 걸 알아서 진행하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4월 29일 오후 4시, 서울중앙지법 524호에서 형사7부(재판장 장수진)는 사기죄로 기소된 고00 씨에 대한 공판을 진행했다. 고 씨는 주식회사 ATN의 최고경영자로서 당뇨 환자도 먹을 수 있는 ‘사카린 캔커피’를 만들겠다며 지인과 투자자들을 모아 투자금을 받았다. 기일에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지 않고 사전에 알리지 않은 용도인 ‘코인’에 투자금을 사용했다. 선물 옵션을 숨겼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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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재판에 이어 증인신문이 이뤄졌다. 검사가 증인 앞으로 가기 위해 일어서자, 검사의 키가 옆에 쌓여 있던 증거 기록지 뭉치보다 커졌다. 증인 장00 씨는 지인에게 피고를 소개받아 투자금을 선뜻 내놓은 적이 있다. 장 씨는 담담하게 신문에 응하다 피고의 과거 발언에 대해 묻는 질문이 등장하자 대답 속도가 느려지며 내용이 짧아졌다. “피고는 증인에게 선물과 옵션에서 매일 5%씩 수익이 생기고 있으니 투자금 130만원을 주면 일주일 후에 주 5일 2%씩 수익금 300%가 될 때까지 지급해 주겠다고 말했습니까?” 검사가 묻자, 증인은 “그건 생각이 잘 안 나요”라고 답했다. 판사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같은 답변이 반복되자, 참 곤란하게 한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증인은 준비된 답을 읽었고 판사는 증인의 목소리를 읽었다. 증인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는 답변의 공백이 생겼고 판사는 갑자기 비어버린 진술에 의문을 품었다. “지금 이 사건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시나요?” 검사의 신문이 끝나자, 판사가 초등학생을 다루는 선생님처럼 타이르듯 말했다. 판사의 말투에는 정제된 친절이 오래된 습관처럼 배어 있다. 억양은 부드럽고 태도는 단호하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 저울을 든 디케를 연상시킨다. 판사는 증인이 2022년 경찰에 진술할 당시 작성했던 보정서를 들춰 증인이 묻어버린 답변을 캐냈다. 증인이 당시 진술이 맞다고 시인하자 증거로 채택하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변호인 신문이 이어졌다. 증인 또래의 나이 지긋한 변호인이었다. 젊은 검사와 재판장에게 궁지에 한 번 몰렸다가 나이대가 맞는 이와 대화하니 증인의 목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질문까지 편안한 건 아니었다. 증언의 신뢰성에 털끝만큼의 의심이 생긴 듯 판사는 신문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변호인께서 물어보신 주요한 질문은 피고인이 코인이나 선물 옵션은 투자자들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고 ‘예’라고 답하셨는데 맞습니까?” 피고인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말을 빙빙 돌렸다 “네. 그런데 우리가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때는 세 가지 설명을 다 했죠. 우리 회사에서는 사카린 사업을 하는데 코인도 돈이 되는 사업일 수 있고 선물 사업 계획도 있다.” ‘투자금이 사용되는 곳에 코인, 선물 옵션도 포함된다는 걸 투자자들에게 숨겼는지'가 쟁점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던 판사는 논점을 잡아채 놓치지 않았다.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증인의 답을 쫓고 때로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친절과 평정을 잃지 않았다. 판사가 똑바로 대답하라며 역정을 냈다간 도리어 증인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십상이었다. 증인은 ‘당장은 코인, 선물 옵션을 얘기할 수 없는데 나중에는 얘기할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판사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지며 톤이 높아지고 말투가 변했다.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이번에는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기필코 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피고인한테요, 강연에서...” 증인이 일곱 명 정도 모인 강연에 두 차례 정도 참석했을 때 피고인은 코인과 선물 옵션에 대해 언급했다고 증언했다. “네, 더 물어볼 것 없습니다. 그럼 증인신문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증인은 후련한 듯, 혹은 허탈한 듯 법정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증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피고인의 얼굴에 첫 번째 증인신문이 끝난 후 생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 씨를 고소했던 송00 씨가 두 번째 증인으로 출석했다. 신원을 확인하는 질문에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이 최초 고소자다웠다. 앉아서 방청석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표정에는 기세가 넘쳤다. 고 씨는 500만원을 빌려주면 이익금 10%를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송 씨에게 돈을 빌려 갔다. 송 씨는 한 회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있는 고 씨의 강의를 들었던 터라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약속한 시일이 되어도 고 씨는 돈을 주지 않았고, 수익금 300%가 될 때까지 매일 2%의 수익금을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돈을 빌려다 고 씨에게 줬던 송 씨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잘못한 상황에서도 “고소해봤자 어차피 가석방으로 풀려날 것”이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고 씨를 고소했다. 송 씨의 증언에 피고인은 공판 시작 이후 첫 한숨을 내쉬었다. 붙잡고 있던 얇은 동아줄이 끊어진 것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피고를 약 2m 옆에 두고 증언하는 송 씨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판사님, 제가 여기 와서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거짓말을 얼마나 달고 사는지 제가 아주 학을 뗐어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장 씨와 달리 크고 머뭇거림 없는 송 씨의 발언에 재판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방청석만 힐끗힐끗 바라보는 것 외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피고인은 마른 세수를 하며 대놓고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변호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을 심란하게 만든 송 씨의 증인신문이 끝나자 변호인의 최종 변론으로 공판이 마무리됐다. 피고의 표정도 처음처럼 텅 빈 상태로 돌아왔지만 녹진한 강풍을 한바탕 맞은 듯 사카린처럼 창백했다. 갈색 코트가 한층 짙어 보였다.


KakaoTalk_20250704_154855335.jpg 재판이 끝난 후. 서울중앙지법의 초여름 하늘은 푸르다


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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