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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의 빛 Jan 17. 2024

엄마를 살게 한건, 엄마였다!


낮의 해가 꺼져 내린 시골.
숨소리마저 스산한 초겨울 길을 지나 집에 도착했다.


"나는 어차피 죽는다. 죽을 나 살린다고 빚 얻었다가 너랑 애들은 어떻게 살 거냐. 수술 안 한다. 내버려 둬라"

덤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아빠 목소리.
내려앉는 울먹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울려왔다.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앉은 가족 식사 시간.
밥알이 자갈처럼 떨걱떨걱 씹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질문 총알이 수백 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건 무슨 말이지?"
"아빠가 어디 또 아픈가?"
"무슨 수술?" "수술해도 못 산다는 건 가?" "왜?" "왜?"
밖으로 내뱉지 못한 궁금증이 쌓여가던 그때.
"왜 죽어. 비장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다는데. 그럼 애들 두고 그냥 죽을 거야? 빚을 내더라도 수술받고 살아야지. 왜 죽을 생각을 해"
엄마가 어린아이 타이르듯 차분하게 아빠를 설득하는 말이었다.

삼키는 눈물에 먹혀 들어가던 목소리는
쌍꺼풀 진~한 움푹 파인 엄마의 두 눈에 차오른 눈물을 보게 만들었다.

결국 못 참고 내가 물었다.
"왜? 수술해야 한대? 수술하면 괜찮대?"
고개를 돌려 톡~톡~ 터져 내린 눈물을 훔치는 아빠를 나도 설득시켰다.
"그럼 해야지 아빠, 20년 전에도 살려주셨잖아. 하나님이 살려주시지 아빠"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서울 사는 큰 이모.
우리 아빠가 제일 좋아한 이모다.
애기 보듯, 대구 여자 최고의 상냥한 사투리로 아빠에게 항상 좋은 말만 해주던 큰 이모.
엄마는 수술 안 하고 죽겠다는 아빠를 큰 이모 보러 가자고 꼬셔서 서울로 올라갔다.
큰 이모 팔짱 끼고 시장 나들이를 하며 아빠 좋아하는 주전부리 실컷 사 먹고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큰 이모의 따듯한 설득에 아빠는 못 이기는 척 대답을 했다.
그날,

서울 어느 시장 골목의 식당 식사가 아빠와 함께한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10일이 지난 1월 초ㆍ중순 그 어느 날 즈음이다.
비장 수술을 위해 새벽 7시에 수술실에 들어간 아빠는 9시간이 넘게 걸렸다.
수술 후 의사들이 의례 하는 말. "수술 잘 됐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에 있는 엄마였다.
"아가.. 흑... 흑..... 아가....."
"엄마, 엄마! 왜! 왜? 아빠 무슨 일 있어?"
"어떡해... 어떡해.. 아빠 어떡해.... 재수술 들어가야 한대. 아빠 어떡하니....."
"왜! 수술 잘 됐다면서 왜! 아빠가 수술 안 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엄마가 억지로 데려갔잖아. 아빠 살려내. 아빠 살려내....!!"
흡사 나는 광기 들린 사람 같았다.
울음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며 온갖 모진 말로 내 엄마의 가슴을 도려냈다.




화요일 재수술 후. 그 주말 일요일이었다.
반주하느라 교회에 있던 점심시간.
교회 전화로 엄마가 나를 찾았다.
아빠가 이상하단다. 의사는 "괜찮다, 자고 있는 거다. 잘 회복 중인데 보호자가 의료진을 못 믿고 이러면 더 이상 치료 못한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물어보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평생 간경화 남편 병시중,

교통사고 후유증 장애인 남편 보살펴온 우리 엄마다.
엄마 눈에는 이상하댔다.
면회 시간  중환자실 들어가 보니 아무 말이 없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베드에 누워 있는 아빠 손ㆍ발이 묶여 있단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눈도 안 뜬다. 의식이 있으면 꼬집을 때 신경이 반응해 몸이 움찔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래도 나는 엄마를 안심시켜야 했다.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수술 잘 됐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갈게 엄마"




다음날은 아빠가 재수술 들어간 지 일주일 뒤.

내 생일이었다.
친구가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미역국을 끓여 상을 차려놓았다.
미안했지만 아빠 보고 와서 먹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올라간 병원.
엄마랑 함께 들어간 중환자실.
산소호흡기를 낀 아빠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엄마와 나는 의사의 말에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환자분이 패혈증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땅이 꺼졌다.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00 아빠.. 눈 좀 떠봐. 응? 당신 이렇게 가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하루라도 안 씻으면 난리가 나는 사람이 이게 뭐야. 00 아빠. 일어나 봐....."
맥 풀린 온몸을 베드 난간에 걸쳐 기대 엎드려, 연신 아빠의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마가 울었다.




며칠 후.
깊은 새벽, 꿈을 꾸었다.
병원에 있어야 할 아빠가 시골집에 와 계셨다.
집안 곳곳을 다니며 안방부터 부엌, 사랑방,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살피며 돌아다니다 아빠가 화장실 볼일 보는 꿈이었다.
깨자마자 엄마한테 아빠 꿈을 꾸었다며 꿈 이야기를 했다.


그때였다.

마치 알람이 울리듯,

중환자 보호자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우리 전화. 아빠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호흡기 삽관.... 자가호흡 불가로... 호흡기 삽관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는 호출.

그날..
아빠는 살아서는 가볼 수 없는 하늘 집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나의 우주가 사라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오래된 낡은 서랍 속.
년도 지난 큰 수첩에는 죄책감과 삶이 힘겨운
젊은 과부의 일기가 쓰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우리 엄마 일기장은 들고 읽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죄책감..
미안함..
괴로움..
남은 자의 삶으로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엄마의 무게 때문에.

당신을 살리려고 그랬다...........
내가 너무 미안하다..........




남편을 살리고 싶었던 아내의 마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돈 없어서 수술도 못하고 죽었다ㅡ

평생 후회하지 않고 싶었던 빚쟁이 아내의 무게

어찌 알 수 있겠나..

그런 엄마에게..
20년 전 나는....
아빠를 살려내라고 울분을 토했다.
생각 없이 쏟아낸 철없는 말이 평생 메아리 창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든다.

왜 그렇게 밖에..
왜 그 말밖에 못 했을까..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ᆢ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동생도 나도 모두 1월생.
하지만 생일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시린 그리움이 곳곳에 걸터앉아 그 어느 달보다 아프고 외롭다.

전하지 못한 말...
20년 전 숨도 못 쉬며 울던 엄마에게
꼭 해드리고 싶은 말...

"엄마! 절대로 엄마 때문이 아니에요"
"엄마가 있어서 내가 20년 동안 얼굴 보며 아빠라고 부르고 살았어요"
"엄마 덕분에 아빠 얼굴, 아빠 이름, 아빠와의 일상 기억하고 살아요"
"엄마!! 진짜로 엄마 덕분이에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던 엄마.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엄마를 살게 한 건 '엄마'였다.


엄마가..

엄마라는 인생의 사명이..

엄마를 살게 했다.



생일날 큰 소리로 전화해야지.
"엄마! 엄마로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엄마가 내 엄마라서 진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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