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여고동창회관에서 회보를 만드는 중이었고 사무국장이 “그림 하고 시가 왔어요”하며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시를 보내온 사람이 우리 동기인 최수지라고도 했다.
“최수지? 부산에 사는?” 그녀의 이름을 들으며 옛 추억이 조금씩 올라왔다.
여고 시절, 우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곧잘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문예반’에서 늘 만났고 혹독한 사춘기의 질풍노도 같은 감정들을 공유하며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우리 둘이 다 지고 있는 듯 지냈다. 친구는 부산으로 취직을 해서 떠났지만 우리들의 연서 같은 편지는 참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난 대학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을 갔고, 연락은 끊겼다.
살면서 늘 궁금했던 친구, 부산에 살며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고 한다. 친구의 연락처를 받아 들고 저녁 시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전화를 했다. 긴 통화가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전화번호를 누르며 가슴은 달막 달막. 그 옛날 첫사랑에게 전화를 거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여보세요”
“나, 지은이, 최지은…”
“진짜? 미국 갔다던?”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40여 년의 세월을 어찌 전화 한 통화로 다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30여분 이어졌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친구는 ‘그해 여름의 나의 이별’을 기억했다. 누구나 살면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겠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이별은 참 힘들었다. 많이 가슴 아파했다. 그 아픔을 친구는 그날 밤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눈물, 콧물 쏟으며 친구를 잡고 풀어놓았던 나의 이야기. 아픔을 다독여 주지도 않고 그냥 무덤덤하게 듣고 만 있었다. 그렇게 풀어놓았던 때문인지 그 이후, 아픔을 간직한 채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픔의 무게는 가슴에 침전된 채 아직도 남아 있어, 친구와의 전화 속에서 뿌옇게 올라왔다. 그러나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사람 사는 일은 다 비슷하여, 사랑도 이별도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늘 아쉬움이 남고, 헤어졌기에 그 사랑이 더 절실하며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
친구는 2번째 시집을 발간하였다. 아침 해가 뜨면 한 권 보낼 테니, 주소를 보내 달라고 했다. 강릉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며 만감이 교차한다.
그때 우리는 문예반을 같이 하며 3명이 모여 ‘합동 시화전’을 열었다. 강릉시내에 있던 <우미당>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여고생들이 무슨 시화전이냐고 했지만, 객기를 부리며 우린 ‘할 수 있다면서 각자 10여 편씩 작품을 냈고, 미술반의 도움을 받아 시화를 만들 수 있었다. 한 일주일쯤 전시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접대용 단팥빵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참 고운 시어들을 길러냈다. 그 주옥같은 시어들이 참 부러웠는데, 역시 그녀는 지금도 시를 쓰고 있었다. 변명 같이 난 이야기했다. ‘살다 보니 시인은 순간 포착이 잘되어야 하고, 번뜩이는 시상이 있어야 하겠더라. 난 그냥 내 신변잡기를 그럭저럭 쓰며 상도 타고 책도 내고 살았어… 그래도 미국에 살며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일을 놓지는 않았으니 칭찬해 줘” 라며. 통화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옛날 생각을 하며 밤새 뒤척거렸다.
반가운 친구의 시집이 도착했다. <<손톱에 박힌 달>> 꼼꼼히 읽었다. 배수구 청소를 하다가 손톱에 뭐가 들어갔고 그게 덧났다 아물기까지 그린 시. 작은 일상을 시로 만든 시인의 시선에 따뜻한 마음을 보내며 나도 서둘러 내 책을 한 권 보냈다. 나의 책을 읽으며 친구도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겠지. 어느 날 강릉 바닷가에서 다시 만나 회포를 풀 그 시간,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