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글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지은 Feb 13. 2023

어느 하루의 기록

보글 보글과 함께 하는 어느 날

 

커피 주전자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다. 커피 향에 서서히 뇌의 세포들도 잠에서 깬다. 여명이 시작되는 창을 통해 보이는 바다. 전화기속 일정표에서 오늘 할 일을 확인하며 한 모금 넘기는 커피. 따뜻함이 목에서 느껴지며, 오늘 하루도 행복하자는 생각을 한다.


컴퓨터를 켜고 남은 커피 잔을 들고 와 앉는다. 신문을 보고, 날씨를 보고, 브런치를 열어본다. 세계와 동네 소식까지 보며 내 감정이 온전하도록 심호흡을 한다. 나 같은 미물의 역량으로는 바뀌어 지지 않을 사회. 애써 외면하며 브런치를 열고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는다. 내 브런치에 올라와 있는 일람을 켜 보기도 하고 한참을 브런치에서 논다. 커피는 식었고, 은은한 향은 작은 내 방에 가득하다. 두번째 잔을 내려야 할 때는 컴퓨터에서 글을 쓰거나, 온라인 클래스를 들어야 할 때다. 듣고 있는 강의는 ‘와인 소믈리에 클래스.’ 늘 관심이 있었고, 아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미국에 있을 때는 늘 바빠서, 따로 강의를 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와, 혼자 있는 요즈음엔 나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 미국에 있는 남편이 들으면 섭섭할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미국 시간을 확인하고 비디오 톡을 한다. 매일 아침 하는 아침인사이다. 난 늘 컴퓨터 잎에서 부시시한 모습이고, 남편은 가게의 사무실이거나 자기 방이다. 나는 오늘 무얼 할지, 이야기하고 남편은 오후 시간이므로 그날 일을 대충 이야기해 준다. 같이 있을 때는 그렇게 매일 마주 앉아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었다. 식사 시간 잠깐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저녁 시간 가게까지 함께 걷는 시간이 유일하게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그것도 걷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못한다. 내 걸음은 날아갈 듯 빠르고, 나를 쫓아오느라 허덕거리는 남편은 힘이 들어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다. 아주 가끔, 이야기를 한다면 늘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거나 성당 일이었다.


오늘처럼 컴퓨터 앞에서 시간이 길어지면 또 한잔의 커피를 들고 앉는다. 허리를 세우고 부드러운 빛의 스탠드를 켜고, 전화기를 확인하며 글을 쓴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자판기 두드리는 내 손도 빨라진다. 글 하나가 만들어지면 다시 읽으며 첨삭을 한다. 그 후 일기장 같은 메모장을 꺼내, 이글을 쓰며 꼭 넣고 싶었던 메모들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성경 필사를 두어 페이지쯤 한다. 쓰고 있는 것은 <시편>. 지난 대림 절 첫날부터 시작했던 것은 미국의 우리 본당 신자들이 함께하는 일이다. 주임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내 준 숙제 같은 것이고 매 주일 주보에 그 주일에 필사 한 양에 대한 설명이 실린다. 이미 필사를 한번 했던 것이긴 했지만 모두들 다 같이 하는 일이라 나도 같이 하고 있다. 가끔, 남편은 자기가 쓴 것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는데, 한국어 옆에 영어도 같이 쓰고 있다. 잘한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해는 거의 중천에 올라와 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아파트를 나선다. 마트에서 엄마가 좋아하시는 과일이나 초콜릿, 부드러운 과자 등을 사서 약속된 시간에 면회를 간다. 요양원 현관. 체온 체크를 하고 가정용 키트로 코로나 검사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방문자 기록을 한다. 안으로 들어가 면회실에서 엄마를 만나면 나는 십대의 아이로 돌아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가늘고 창백해진 엄마 손을 비비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 놓는다. 한 40-50여분 동안 거의 똑 같은 이야기들을 매번 하지만, 나를 알아보실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엄마의 상태에 따라, 요양원을 내려오는 발걸음의 무게는 달라진다. 어느 날은 날을 듯 가벼웠다가, 또 어느 날은 돌을 매단 듯 무거울 때도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내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엄마가 그 언덕 위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만으로, 내가 찾아 갈 수 있고, 손잡아 드릴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물론 감사하다.


가끔은 돌아오는 길에 시내에서 볼일을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집으로 온다. 가벼운 점심을 먹고 친구와 솔밭길을 걷는다. 솔밭 풍경은 비슷하지만 옆 바다는 매일 다르다. 바다 색과 파도와 수평선과 구름. 걷고 있으면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걷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가끔은 옆에 친구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다가. 아차 싶어 뒤돌아보면 친구는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빠른 걸음을 탓하며 속도를 좀 줄인다. 등에는 땀이 나고 숨은 좀 가빠진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걷고 있으면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심호흡만으로 온전히 내가 되어, 걷는다. 빠른 걸음 속으로 모이는 나의 모습은 어쩌면 나의 과거인지도 모른다. 한번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끝까지 하는 열정. 그것이 걸음의 속도와 보폭에 그대로 배어 있는 것 같다. 이젠 좀 천천히 걸으며 편안해도 될 나이건만 아직도 그 열심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걷는 일조차, 잰 걸음이다. 걷다가 만나는 운동기구들이 있는 작은 정자. 그곳에 도착하면 기구들을 이용해 운동 몇 가지를 하고 숨을 고르고 다시 돌아선다. 천천히 가려는 것은 생각일 뿐 또 다시 빠르게 걷는다. 앞에서 휙 지나가는 청설모 한 마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 참 같이 걷고 있는 친구가 있지.’ 뒤돌아보며 친구를 또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와 땀을 식히며, 독서를 하고, 야채와 단백질 위주의 소량의 저녁 식사 후, TV 채널을 돌려본다. 지난 주까지는 ‘알쓸신잡’을 주로 봤고, EBS나 한국기행 등을 본다. 왜 그리 홈쇼핑이 많을까 생각을 하며 채널을 옮기다가 마지막에는 CNN을 본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가끔은 체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별 신통한 것들이 없으면 다시 책상 앞. 따스한 빛의 등이 좋아 더 오래 이곳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사각사각 써지는 펜을 들고, 메모장을 꺼내 오늘 한 일들을 메모한다. 별 특이한 상황이 없는 일상이지만, 늘 메모가 되는 것 또한 신통한 일이다. 엄마의 한 마디를 놓치지 않게 적기도 하고 맛있는 딸기 맛을 적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산 물건을 기록하기도 한다. 하루의 궤적이 그대로 나타나는 간단한 메모.


어느 날 다시 들춰보면, 그 시간엔 이런 생각들을 했구나 싶을 수도 있고, 혹 기억력이 떨어지게 되면 나의 기억을 되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오는 일이다. 그렇다고 일기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일기는 그 옛날 꼭 해야 했던 방학 숙제 같아서 싫다.

바다도, 솔밭도, 거리도,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남고, 침대에서 다시 책을 펼친다. 나를 잠재우기에 최고 명약인 누워서 독서하기. 서너 권의 책과 연필을 비추어주는 또 다른 작은 등. 그 안에서 나를 잠재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면회를 갈 수 있는 엄마가 아직 이곳에 계시고,

같이 걸을 수 있는 친구가 있고,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남편이 있고,

따뜻한 등처럼 나를 감싸주는 시선이 있어 감사하다.

이 편안하고 소중한 하루들이 내 안에서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포근한 이불의 끝을 당긴다. “오늘 하루도 고마워, 사랑해.” 사각사각 펜소리가 혼자 있는 방의 정적을 깨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나바다' 나눔의 기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