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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Feb 21. 2023

따뜻한 말 한마디

"참, 수고 많았어"


따스한 기운의 봄이 오는 가 싶더니 갑자기 폭설이 왔다. 그 위세가 대단해 하늘인지 바다인지 솔밭인지 구분이 안된 뿌연 세상만 창밖에 가득하다. 실내 온도를 한 칸 올리고 전기장판의 눈금도 올리며 집안에서 보낼 며칠을 준비한다. 누룽지를 한 움큼 집어 보글보글 끓이면 그 구수한 냄새가 따듯함을 더 한다.

베개를 꺼내, 소파에 기대고 앉는다(언제부터 인가 베개는 쿠션의 역할이 더 커졌고, 소파는 나의 등받이용 도구로 전락했다). 몇 권의 책과 연필, 그리고 셀 폰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무슨 책부터 읽을까 뒤척거리다, 가장 가벼운 책부터 펼친다. <<좋은 생각>> 짧은 이야기들이 이어져 있어 편하게 읽기 좋다. 이 작은 잡지의 장점은 모든 이야기들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그 짧은 한 페이지의 단상에서 배어 나오는 따뜻함. 작은 잡지의 선기능과 방안 가득한 구수한 냄새가 되돌아간 계절을 감싸주기에 충분하다. 책장을 넘기며 가끔 밑줄을 긋기도 하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다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커피를 한잔 만들어 자리를 옮긴다. 작은 등을 켜고 빠르게 자판을 두드린다.


요즈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봤더니, “감사합니다.”인 것 같다. 자주 이야기하지만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인생의 이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그 기울기에 동승하며 서서히 내려간다. 억지를 쓰며 잡지 않는다. 지난 시간들, 얼마나 감사한가. 녹록지 않았던 이민 사회에서 그만큼 했으면 소시민의 역할을 충분히 했고, 퇴직 후 편안하게 한국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 장시간 하늘길에 떠 있어도 며칠이 지나면 현지의 시간으로 적응이 되는 내 체력도 감사하다. 매일 운동하고 친구와 수다 떨고, 좋은 곳을 가 볼 수 있고, 엄마를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지난주의 글과 중복되는 것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말 그대로 "감사” 또 “감사”이다. 아무리 작은 것들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다. 작은 일에 마음을 쓸 수 있는 배려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가 먼저 나온다. 그런 단상들을 가득 싣고 있는 것이 이 작은 잡지인 <<좋은 생각>>. 작은 것의 순기능이 감사하다.

가끔 보는 TV속에서 만나는 세상에는 참으로 경악할 사건들이 많다. 어두움과 절망과 분노가 가득한 세상. 다행히 그 안에서도 가끔씩 따뜻함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만 한 것이고, 나도 매사에 ‘감사함’을 잃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감사’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원망’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시선을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작은 것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누구를 원망할 일도, 미워할 일도, 화가 날 일도 많지 않다. 상대방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면, 모든 일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화가 날 일이 없다. 나도 젊었을 때는 꽤 깐깐한 성격이었다. 스스로에게 용서가 안 되는 행동을 하지 못했고,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되고’ 토를 달았던 날카로운 시선들이 이젠 많이 무디어졌다. 아니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선의 무딤이, 세상을 바라보는 치명적이고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이만큼 살고 보니,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젊음도, 편하게 살았던 그 누구도 똑같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이 무덤덤함이 편하다. 이 편안함이 내게는 모든 일에 ‘감사’로 다가온다. 하루를 집안에서 지내도 감사하고, 내일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그 또한 감사할 것이다.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백사장 풍경에 감사하고, 눈 꽃이 녹아 뚝뚝 떨어져 내리는 차가움도 감사할 것이다. 아직 물기를 머금은 솔밭의 진녹색과 진한 솔 향에 감사할 것이다.

‘감사함’이 이어진 날들. 뒤돌아보면 최선을 다했던 그 시간들의 이어 짐이다. 그 연결의 끝에서 고리들의 느슨함을 만지며 누군가 내게 “참, 수고많았어. 정말 수고 했네”하고 한마디 건네 준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 머리는 세었고, 눈은 어두워졌고, 등은 굽었고, 무릎은 삐걱 거리고, 양말 속 감추어진 갈라진 발뒷꿈치도 인생의 훈장처럼 감사한 일이다.

이 작은 책자 하나를 내려놓으며 오늘 하루도 감사함을 전한다. 따뜻한 손을 잡고, 따뜻한 가슴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브런치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바다로 향한 창에는 뿌연 김이 서려 있다. 포근해 보인다. 실내의 따뜻함이 전해진 것이리라. 닦지 않고 그냥 둔다. 그 흐릿함도 내 안의 감사함으로 살포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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