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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Feb 21. 2023

언젠가부터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내가 듣고 싶은 말"

아버지 40살에 내가 태어났다.

요즘이야 더 늦은 나이에 자식을 낳는 사람도 많으니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바로 위 누나와 11살 차이가 나니, 한참 늦은 것이고

지금의 40대는 청년이지만, 예전의 40대는 생각이나 외모가 더 늙었기에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화보다는 무조건 복종이 대세였다. 물론 집마다 다르겠지만.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고 수업 시간에 일어서야 했어도,

학용품을 사야 하는데 깜빡 잊고 전날 저녁에 말하지 않았을 때도(아침에 돈 달라하면 장사하는 집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던 시절이니 아침에 말할 수 없다.),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 했다가 친구와 절교를 했을 때도(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내 저금통에 10만 원이나 있어야'' 이 돈이 얼마나 큰 지 몰랐다. 집에 돌아와서 이 말을 부모님께 했다. ''내 친구는 10만 원이나 있데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친구에게 그 돈 좀 빌려주라고 해봐라. 돈이 급하게 필요해서 그런다" 나는 연필 하나 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철없는 생각으로 친구에게 말했고 친구도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날 친구는 말했다. "아버지가 빌려주지 말래. 그리고 너와도 놀지 말래"

난 이렇게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될 정도로 심한 몸살감기에 걸렸을 때도,

그 어느 때에도 부모님께 한 번도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었다.


사는 게 참 힘들었다.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재산도 소득도 없는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힘들 때 부모님께 하소연하는 것은 사치였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내가 힘든 줄 전혀 모르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바람을 피우고, 노름을 하고, 엄마가 열심히 벌고 내가 아끼고 아껴 놓은 돈을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가져다주었던 아버지.


등록금 내줄 돈이 없다고 명문대 진학을 막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학교로 등을 떠밀었던 아버지.


아버지 자신의 문제 때문에 군장학금(군에서 주는 돈을 받고 졸업 후 받은 연수만큼 군 복무를 더 해주는 조건이 달린 장학금) 합격 발표가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군장학금을 못 받을 것에 대비해서 보건장학금(복지부에서 주는 돈을 받고 나중에 졸업 후에 받은 년수만큼 보건소에 근무해 주는 조건이 걸린  장학금)도 신청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역정을 내신 아버지(군장학금을 못 받게 되면 당장 납부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했었다. <노름하지 않고 생면부지의 여자들에게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자식 납부금을 주지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


22살 때,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집안일에 전념하시기를 바라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찬장에 숨겨 놓고,

일시적 가출을 감행한 후

엄마께 전화해서 아버지께 편지를 전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엄마께서 아버지가 난리를 치실까 봐 우려한 나머지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고,

누나는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내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아버지께 "장훈이 결혼을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말해버린 바람에,

아버지께서 편지를 읽고 마음을 잡으셨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

결혼하기 위해서 가출해 버린 놈이 되어 있었고,

"중이 염불에는 정신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과 같다"며 호된 질타를 가한 아버지.(자식에게 한 번쯤은 이유를 물어봤어야 할 텐데...)


중간생략. 할많하않.


엄마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매달 200만 원씩 용돈을 드리고, 사시는 곳 온갖 생활비를 다 해결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돈을 주기 위해 내가 일하는 곳까지 오셔서 돈을 더 달라고 하셨던 아버지.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4천만 원이 넘는 돈을 엄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부터 줬다는 말을 고모로부터 들은 날. 그동안의 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다.)


나는 이 후로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했고,

아버지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마음이 어떠한지 등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미행해서 아버지가 어떤 여자를 어디서 만나는지 알아내어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9살짜리 아들에게 시키신 엄마께도 왜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셨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불과 몇 년 전에야 가족들에게 내가 살아온 얘기를 했다.

그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이 없다.

가족들에게 많은 얘기를 했지만, 나를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직접 겪은 것이 아니기에 공감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고,

설령 공감하더라도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나는 자식들에게 많은 말을 했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잘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쓸데없는 간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도움이 되기 위해 말을 했을 때,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얘기가 전개되어 마음이 힘든 적도 있다 보니

더욱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나이를 먹으면 귀,입,눈 다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도 듣고 싶은 말은 있다.

"그동안 무거운 짐 짊어지고 견디며 살아내느라 애썼다"

"힘든 상황 잘 이겨내고 할 일 잘했으니 장하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하다"

누구보다도 아버지로부터 듣고 싶으나,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말해야 마음을 알 수 있는데, 말하지 않은 나도 잘못이므로(말해도 오히려 마음만 상했을 수도 있지만)

퉁.


그래도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얘기를 남겨 놓으셨었다.

엄마께서 돌아가신 후에 전해진 엄마의 얘기에는 나에게 남겨 놓으신 말씀이 있었다.

"아버지 닮지 않고 엄마가 바라는 대로 잘 자라줘서 고맙다"


로운 작가님의


전지은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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