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네어른들께 수시로 들었던 말입니다. 이웃에게 예의 바르고 공부 잘하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말썽 한 번 피우는 일 없이 자랐고 집안일도 잘 도왔지요. 대학생 때는 여행 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제사를 준비한 적도 있습니다. 그날 모이신 친척분들은 입을 모아 말씀하셨죠. "저런 애가 어디 있어.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
"박물관에 가야 할 며느리다."
결혼 후 한참을 어리바리, 좌충우돌하는 며느리로 살았습니다. 시댁 제사를 까먹고 놀러 간 적도 있고 일하는 이는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뾰로통 한 날도 많았지요. 하지만 20년이 넘어가자 시어머니는 저를 박물관에 넣고 많은 이에게 보여주어야 할 며느리라고 하십니다. "너는 못하는 게 뭐냐?"라고 하시죠.
"아주, 고단수다."
햇수로 5년째 저와 교육자원봉사를 다니는 선생님들은 저를 고단수라고 말합니다. 순진한 척하면서 은근히 자신들을 조종한다나요? 호시탐탐 봉사에서 빠질 궁리만 하는 자신들을 점점 더 깊은 봉사의 늪으로 빠뜨리는 가스라이팅을 한답니다. 그런데 그게 또 욕을 할 구석은 없으니 답답하답니다. "가만 보면, 송쌤이 제일 고단수예요. 봉사랑 디베이트에서 발을 뺄 수가 없게 만들어. 엄청 똑똑한 것 같아요."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남편이 제게 종종 하는 말입니다. 스무 해가 넘게 사는 동안 짜증 내고 싸우고 등돌리던 일들은 다 잊었는지, 그 싸움의 원인이 양가 가족이거나 자식이거나 경제적인 문제였거나 모자란 아내 때문이었던 것도 잊었는지 그저 다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시댁이나 친정에 잘하지, 남편에게 잘하지, 자식 잘 키웠지, 살림 잘하지, 자기 일도 열심히 하지.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선물 줘야겠네?"
이렇게 저에게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이가 많은데, 저는 늘 갈증이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저와 '내가 보는 나'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욕구가 강해 겉으로 보이는 저의 모습에는 공을 들이지만 저만 아는 저는 최선을 다하지도, 마음속 깊이까지 상대를 존중하지도, 야무지지도 않은 사람이거든요. 타인들이 말하듯 똑똑하거나 부지런하거나 생각이 아주 바르지도 않고 말이지요.
얼마 전, 친구들과 들어 놓은 보험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서글퍼졌습니다. 무슨 깡다구로 여태 외벌이로 살아왔을까, 남편이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엄마가 빈 공간,시간을 주는 것이 더 큰 손해요 공백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아이들을 다 키우고 보니 우리 부부에게 떨어진 손해와 공백이 컸습니다. 그 모든 선택과 결정이 저의 탓 같았습니다. 조금 더 야무지고 영악하게 살걸... 조금 더 치열하게 살걸... 지금까지 저를 칭찬하고 치켜세워주던 타인들의 시선이 걷히고 제가 저에게 보내는 비난과 책망의 손가락질이 저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잘하고 있다."
"넌 참 괜찮은 사람이다."
남에게 듣고 싶던 말은 이미 다 들었습니다.
정작 제가 제 자신에게 했던 말은
"왜 그것밖에 못하니?"
"그게 최선이니?"
"정신 차려라!"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구나 너는."
"참 못났다..."
"으이구으이구..."
같이 온통 저를 짓밟는 말이었습니다. 제 자신은 저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죠. 어느 것 하나도...
남은 생은, 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야겠습니다.
제가 저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요.
"유정아~ 너 참 괜찮은 사람이다. 참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믿어~"
* 저의 낮아진 자존감을 알아본 지인 한분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보라며 책갈피를 선물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