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한 시간들을 보내는 이쯤의 나이에도 가끔 찾아오는 불청객.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어느 한순간, 마음에 딱 걸리는 것.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일수도 있고, 자주 만나는 이들의 시선이나 몸짓을 때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본모습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일들이 마음속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시선을 돌려 좋은 것만 바라보려 한다. 쉽지는 않지만 어느 시간에도 따뜻한 시선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래도 잘 안될 땐, 나의 스트레스 풀기의 방법은 두세 개가 있다.
일단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잔다.”
자고 또 자고. 이건 가벼운 스트레스 일 땐 효과가 있다. 자는 동안엔 잊어버릴 수 있고 긴 잠을 이어서 자고 또 자고 나면,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조차 잊을 수도 된다. 이건 완전히 나 같은 ‘잠보’의 해결 방법이고, 작은 것 들에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강도가 센 스트레스인 경우엔 “노래를 부른다.”
다행히 미국 집은 옆 집과의 거리가 멀어, 아무리 소리소리 지르며 노래를 불러도 공해가 되지 않는다. 노래의 종류는 성가부터 트롯까지, 말 그대로 되는대로 불러 보는 것이다. 음정 박자 상관없이 한 두어 시간 부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 해진다. 한국에 나와 있으면서 가장 힘든 것이 노래를 못 부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노래방을 틀어 놓고, 볼륨과 에코를 한껏 넣고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 부르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는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노래 부르기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긴 아파트에 살고, 노래방 기계도 없고, 또 혹시 컴퓨터를 켜고 노래를 찾아 부른다면 층간 소음이 겁이 난다. 그래서 3월이 되면 개학과 동시에 시작되는 동창회 모임들 중에 노래 교실을 가보거나, 성당 성가대에 임시라도 조인하여 노래를 좀 불러야 할 것 같다. 예전에 한국에 나왔을 땐 동네의 골목마다 보이던 동전 노래방도, 작은 포차 같은 노래방도 모두 사라지고,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곳이 유행이 지나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보다 좀 더 고질적인 불청객이 찾아오면, 모자를 눌러쓰고 두꺼운 목도리를 둘둘 감고 “걷는다.”
옆에 친구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다. 빠른 걸음으로 땀이 나도록 속보를 하다 보면 숨이 가빠지며 내쉬는 날숨으로 스트레스도 함께 날려간다. 미국에 있을 때는 인적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동네 길을 걷거나 가까이 있는 공원의 나지막한 산길을 걸었다. 여기서는 매일 다른 색과 다른 물결을 밀어내는 바다와 만나는 솔밭을 걷다 보면, 스스로 무엇 때문에 힘이 들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사는 일이 다 그런 것, 불청객이 좀 찾아왔다고 해도, 곁을 내주며 함께 가보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인 것 같다.
스트레스가 없이 사는 일은 가능할까?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는 시선에 따라, 어떤 일은 스트레스 일 수도 있고, 삶의 쌉쌀하고 달콤한 양념일 수도 있다. 양념이 조금 과하게 쳐졌거나, 너무 맵고 짜면 조금씩 덜어 먹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오늘도 나는 빨리 걸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심호흡을 한다. 안경 위로 올라오는 뿌연 입김 속으로 나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다. 날아간 불청객은 물결을 타고 아득히 먼바다 끝으로 흘러간다. 수평선에 흰구름이 가득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