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초등학교 6학년 아이 둘이 시작한 수업에 2021년 초 두 아이가 합류하면서 4명의 완전체가 된 수업은 늘 시끌벅적했습니다. 여학생 넷은 다행히 잘 어울렸고 소녀들 특유의 밝은 텐션은 지켜보는 저의 텐션마저 끌어올렸습니다. 아이들은 수업 중간 쉬는 시간이면 거울 앞에 우르르 모여 사진을 찍거나 걸그룹 노래를 틀어놓고 군무를 추었습니다. 덕분에 IVE의 'Love Dive'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야 했습니다.
매주 만나 토론을 하던 우리의 수업은 아이들이 중3이 되면서 흔들렸습니다. 중간, 기말고사를 앞두면 2,3주씩 휴강을 해야 했고 디베이트에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진 아이들은 호시탐탐 딴짓할 생각만 했지요. 지난여름, 저는 결국 학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 수업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디베이트는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 각자의 시간을 좀 더 귀하게 쓰자고 했지요. 그런데 저의 선언은 무력한 혼잣말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님들 모두 학년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이 시간이 너무 좋다는 것이었죠.
"아이들이 이 시간을 너무 좋아해요. 선생님이 해주시는 잔소리가 도움이 된대요."
"선생님~ 이 시간은 힐링이 돼요. 스트레스 쌓이는 다른 학원이랑은 달라요."
결국 수업은 고등학교 통합사회를 공부하는 것으로 반년을 더 이어갔고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진짜 마지막 수업을 했습니다. 책거리이자 길었던 수업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저는 떡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은 손수 쓴 편지와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뭉클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우리는 수업이 끝나도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유행하는 즉석사진샵으로 돌렸습니다. 아이들 틈에 섞여 사진을 찍고 제 몫의 네 컷 사진을 받아 들었습니다. 다섯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한 바퀴 돌자는 아이들의 말에 따라 잔망스럽게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러는 내내 지난 4년이 떠오르며 참 행복했습니다.
"쌤! 저 이번에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 탔어요. 기대도 안 했는데.... 저 진짜 글쓰기 실력이 좋아졌나 봐요!"
"저희 토론대회에서 2등 했어요. 처음 나간 대회인데 어떻게 저희가 2등을 할 수 있었는지 너무 신기해요~ 그런데 좀 아깝기도 해요. 저희가 더 잘한 거 같은데."
소극적이었던 아이가 자신감을 얻게 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알지 못하던 아이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지난 시간이 저에게만 기쁨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 저와의 두 시간이 안식처 같은 수업, 숨구멍 같은 수업이었다니,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무한 AS 해주는 거 알지? 고등학교 가서 수행이나 발표, 대회 등 등 필요한 순간에는 계속 나를 적극 활용해~ 힘든 일 있을 때도 연락하고~" 저의 마지막 인사에,
"쌤! 우리 방학 때 꼭 만나야 해요. 그리고 쌤 이름을 2026년 1월 1일로 저장해 놨어요. 그날 꼭 막걸리 사주세요~" 아이들은 화답했습니다.
입시의 무게로 벌써부터 헐떡이는 아이들의 고등학교 3년이 저로 인해 조금은 덜 힘들다면, 그들에게 숨구멍으로 존재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참 의미 있는 시간을 살겠구나 싶습니다.
저에게도 수업은 숨구멍이었습니다.
해맑고 천진한 그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저도 그들과 같은 나이가 되어 어른으로서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 스트레스 해소법은 '망각'입니다.
어차피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은 불문율이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피할 수 없는 일과 해소되지 않는 감정에서 잠시라도 떠나는 방법을 각자의 방식으로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인 109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술 마시기'가 1위(13.9%)를 차지했습니다. 운동(11.3%), 영화감상(10.2%), 맛있는 음식 먹기(8.8%)가 뒤를 이었습니다. 모두 '망각'을 위한 도구입니다. 저도 가끔 혼술을 하거나 매운 닭발을 콧물 훌쩍이며 먹습니다. 이불 푹 뒤집어쓰고 잠을 자거나 운전하며 펑펑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법은 '수업'이었습니다.
힘들었던 관계, 일, 상황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몰입을 통해 잠시 잊고 지워버리게 됩니다. 돌아오면 모든 것은 그대로이지만 잠시 호흡을 가다듬게 해주는 숨구멍을 갖고 있는 저라는 사람은 조금 달라져 있지요. 다시 차분히 마주하고 차근히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또 오늘을 살아갑니다. 잊어야,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