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지은 Nov 30. 2024

자율주행

싸이버 트럭 옆자리에서


4년 전 어느 날, 남편은 전기트럭을 산다고 예약을 했다. 선금은 100불. 농담이거니 하고 지나쳤다.  전기트럭의 견고함을 보여 주기 위한 시연에서 창이 박살 나고 그 회사의 주가가 요동을 치는 상황들이 지나며 전기차가, 특히 전기트럭이 일반화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구나 싶었다. 지난여름, 남편은 싱글벙글 트럭을 받을 순서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단다. 제동을 걸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다린 시간이 있고 이번 순서를 놓치면, 다시 맨 뒤로 가야 해서 얼마나 더 기다릴지 모른단다. ‘인생의 마지막 차’라며 꼭 산단다. 일흔이 지나 사는 차,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고, 안전성을 강조하며 꼭 사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래, 평생 애썼으니,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겠지 라며 넘어갔다.


드디어 싸이버 트럭을 찾는 날. 주차장에 몇 대 세워진 차를 보고, 그야말로 기절할 뻔. 모양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난감할 정도로 공상 만화영화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것 같았고, 그 크기는 과히 압도적이었다. ‘와~~~ 어글리~~~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차를 몬다고?’를 계속했지만 남편은 신나서 대금을 지급하고 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차를 여는 것부터 충천하는 것, 정규 서비스를 받는 것까지 앱으로 실행한다. 핸드폰에 앱을 다운하고, 차량의 고유 번호를 입력하고 등록과 보험까지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하기사 이젠 집 전화도 없는 상황이고 보면, 모든 일상이 핸드폰 하나로 처리된다. 내 핸드폰에는 아예 전기차 앱을 깔지 않았다. 내가 운전할 상황은 전혀 생길 것 같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은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 버튼은 뭐고 저 버튼은 뭐며…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무슨 딴 나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처음 폴더 폰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말 그대로 신기했다. 병원 당직이면 들고 나와야 했던 삐삐에서 말 그대로 장족의 발전을 했던 시기. 신문물은 신기했고 편했다. 그러다 곧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있어도 전화가 된다는 사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니터 되고 있다는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때론 각자의 사생활도 있는데 내가 누구에겐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느낌. 비밀 번호가 생기고, 락을 걸 수 있는 장치도 보완됐다. 그러나 세상은 급속도로 변해 이젠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5년 이내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고들 한다. 미국 대선을 통해 날개를 단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2기의 기세를 등에 업고 승승 장구 할 모양이다. 자율주행, 하늘을 나는 택시, 공중 배달, 화성으로 여행 등등.

집에서 가게까지의 거리는 차로 5분 정도의 거리. 어느 날부터 남편은 그가 애정하는 싸이버트럭의 자율 주행 기능을 쓰고 있다. 차는 제법 똑똑하게 알아서 간다. 정확히 주행속도를 지키고 스스로 깜빡이를 커며 좌, 우측 회전을 한다. 신호등 앞에서도 정확히 선다. 지나가는 차들과의 간격도 정확히 지킨다. 화면에는 푸른 등으로 주행방향을 알려 주고 모니터는 가는 길을 정확히 표시해 준다. 운전을 하는 남편의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올라가 있다. 늘 옆자리에 타는 나만 조마조마.  

‘핸들 잡고 가. 혹시 모르잖아.’

‘나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운전해. 걱 정마.’


가장 급변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세대는 문명의 급발전 혜택을 너무 많이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혼돈의 세계 속에서 헤매는 것인지. 아직 난 아날 로그의 느림이 편하다. 혹자는 적응을 못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어쩌면 안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심호흡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계절의 바뀜을 느끼며, 손글씨로 메모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컴퓨터 앞에서 자판기를 두드려 글을 쓴다. 사람의 이중성이란 이런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