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을 시작하며
가을이 짙어가던 시월 어느 날, 본당 신부님의 방문. 그냥 가게 구경을 오시는 것으로 알았다. 조금 넓은 크기의 매장과 10,000 여가지 이상의 각종 주류를 구비해 놓은 주류소매점. 동네에서 꽤 알려진 곳이기도 한 우리 가게. 한국에서 이곳으로 부임하신 지 몇 달 안 되는 신부님의 궁금증과 신자 방문쯤으로 알았다. 가게의 주소를 드리고 남편과 나는 따뜻한 차 한잔 준비하고 기다렸다. 약속 시간에 도착 한 신부님은 자기가 본 주류판매점 중 가장 큰 곳 이라며 놀랐다. 진열된 모든 술을 둘러본 후, 식어 가는 차를 앞에 놓고 사는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어갔다. 그러더니 신부님은 나에게 ‘사목회장’을 맡아달란다.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준비 돼 있지 않아,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 기도도 해 보겠다는 말씀만 드렸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거절할 적당한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울의 초입에서, “소명”으로 알아듣고 무겁고 어려운 자리를 맡아보겠다는 답을 드렸다.
퇴직을 하고, 한국을 오가며 엄마를 살피던 일이 끝났고, 읽고 쓰는 일을 주로 하며 사는 요즈음. 삶의 게으름이 주님 눈에 띄었던 것일까? 나의 성소를 찾아 열심히 하라는 채찍인 것 같았다. ‘내가 사막 가운데 있을 때…… 광야에서 길을 잃어도…… 평화와 사랑 부어주시는 주님……’ 그렇게 이어지는 성가가 갑자기 떠올랐다. 또 하나, 얼마 전 전교 주일의 강론에서, 2000년 인류의 역사 안에서, 교회는 잘못도 있었고, 박해도 심하게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고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전교는 복음, 신앙, 삶의 모든 모습에서 베어 나야 하는 것이고, 우리들 하나하나는 삶의 모습으로 증거 해야 한다는.
과연 나는 오늘의 모습이 누구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까? 더구나 종교를 갖은 신앙인으로 누구에겐가 다가갈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못한 죄 많은 미물이지만,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첫 번째 여성 사목회장’이라는 이 자리는 내가 지고 가야 하는 나의 십자가 일 수 도 있다. 주님은 ‘지고 갈 만한 십자가’만 주신다. ‘예’라고 답을 했지만 가다 보면 어깨가 아플 수도 있고, 등이 휠 수도 있으며,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로니카가 닦아 주었던 주님의 피땀을 묵상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 보려고 한다.
대림절 주간이다. 가장 짙은 색의 보라색 초 하나가 밝혀졌다. 다음 주에는 2번째의 촛불이 켜지고 점점 환해지며 주님 오신 그날, 성탄절을 맞는다.
대림. 영어로 advent,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어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말이다. 교회력으로는 전례의 새해 첫날이기도 하다. 그 첫날에,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주님. 그분의 모습을 배우며 감사히 이 자리를 받는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는 약속만 드린다. 나의 일, 나의 십자가, 나의 가장 낮은 자리만을 놓지 않아야겠다. 먼저 다가가 손잡아 드리고, 이야기 들어 드리고, 따뜻한 미소와 작은 마음을 보탤 것이다. 주님 오시는 날은 반짝거리는 장식이나 명쾌한 캐럴 송만으로 미루어 두지는 말자. 진실로 회개하고, 일상을 고백하며, 먼저 다가가는 나의 모습이 되자, 는 요즈음의 매일 새벽기도. 오래오래 같은 마음이고 싶다.
새로운 시작, 그분의 부르심에 감사하고 행복하며 즐겁게 해 보려고 한다. 가슴은 뜨겁다. 어둠 속에서 하나씩 촛불을 밝히는 빛은 옆으로, 이웃으로, 사랑이 되어 스며들고 ‘온 마음 다해…’ 기도 같은 성가처럼, 뜨거운 가슴 안으로 별들은 환한 빛이 되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