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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Apr 07. 2022

이 남자와 42년을 살아보니

42번째 결혼기념일

               


참으로 긴 세월인 듯한 42년이라는 숫자. 그러나 돌아보면 어느 한순간에 여기까지 와 있나 싶게 빠르게 지나왔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던 시간이었다. 


너무도 어렸던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던 우리. 만남을 일 년 반 정도 했고, 능력이 있어 보여 별 고민 없이 결혼을 했다. 아들을 낳고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긴 세월 이민이라는 삶을 살고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삶은 늘 계획하는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혼 초는 생활에 쫓겨 무슨 기념일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박사과정 공부로, 난 미국 간호사(R.N.) 준비로 너무 힘들었다. 


유학생 생활이 조금 길어지고 나름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알게 된 미국 문화. 결혼기념일은 매해마다 의미를 두며, 그 의미에 따라 알맞은 선물을 해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예를 들어 결혼 1주년이면 지혼식이라고 하여 종이로 된 무언가를, 결혼 5주년이면 목혼식이라서 나무로 된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것. 


결혼 초, 삶의 무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지나고 십여 년은 기념일이 되면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 한번 하는 것으로 흡족했다. 그러다 한 20 년쯤의 세월이  지났고, 모처럼 긴 여행을 떠났다. 알래스카 크루즈. 만년설의 설국에서 만난 신비한 풍경 때문이었을까, 그 시간까지 나를 지켜준 한 남자가 참 고마웠다. 선물을 하나 샀다. 알래스카 원목을 깎은 곰 목각인형이었다. 얼음이 덮인 설원에서 선물을 건네며 말했다. 


"나를 견디어 줘서 고마워."


목각은 곰이었고, 곰의 발음은 베어, 즉 견딘다(bear)는 말과 동음이의어. “Bearing with me” 같은 뜻으로 건넨 말이었다. 남편은 나의 표현과 선물에 감동한 눈치였고,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시 20년이 되던 2년 전. 결혼 40주년인 루비 기념일. 루비로 된 선물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기념일엔 좀 의미 있는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지중해 크루즈를 예약했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복병은 끝내 우리들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해 봄은 코로나의 극성기였다.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고, 간혹 픽업 만 할 수 있는 식당만 열려 있었다. 근사한 외식은 포기를 했고 정성껏 만든 집밥에 샴페인 한잔으로 모든  걸 대신했다. 그날은 아름들이로 사다 준 장미 향기에 취했던 걸로 기억한다. 작년의 상황도 별 달라진 것이 없어 그냥저냥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42년을 함께 한 시간을 자축하기 위해 근사한 스테이크 하우스를 예약했다.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어떤 와인을 함께 마실지 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의 둘만의 외식이다.





42년을 함께 한 세월을 기념하는 시간.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고, 장미 꽃다발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근사한 식사를 하며 지나간 이야기 나누어 본다. 


뒤돌아보면, 쉽지 않았던 세월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만 들었던 시간들도 아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날 지켜 주었고, 나의 모습들을 대견하며, 잘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일 사람. 


앞으로는 그 울타리에 기대어 편안해지는 노후를 생각해 본다. 그의 손을 잡고 서산 너머로 지는 붉은 노을을 함께 바라본다. 그 따스함은 가슴을 지나 온몸으로 퍼진다. 참 감사하고 고마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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