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빗소리에 깼다.
새벽잠이 없는 남편은 어느새 나가 한 바퀴 돌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즐거워했다. 그새 비도 그쳤다. 비 그친 뒤의 청량함으로 시작하는 아침. 막 내린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일정을 조율했다.
친구 남편은 예정에 없던 구례 화엄사를 들리자고 했고, 우리 남편은 남원이 궁금하다고 했다. 지도 상으로는 두 곳 다 전주에서 여수로 가는 길목에 있어 조금씩만 우회하면 된다고 했다. 두 곳은 우리도 친구네도 처음이라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도 더 했다. 그 많던 길가의 차들도 인파들도 사라진 거리. 두 번째 가 본 한옥마을은 난개발의 문제들이 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역사 안에서 자리 잡힐 이곳이 더 잘 가꾸어지길 기대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한 시간 남짓 걸려 구례 화엄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절 집이 보이지 않아 잠시 당황. 내려오는 길손에게 물어 숲으로 가려진 곳으로 올라갔다.
지리산 3대 사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규모가 엄청났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숙연해지며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사자탑, 오층 석탑, 대웅전 등 다른 사찰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보제루’라는 건축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불자가 아니어서 다른 사찰들을 많이 돌아보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보제루’는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었고 건축물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돌아와 문헌을 찾아보니, 화엄사의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 건물이라고 하며,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라고 한다. 둥근기둥 하며 곡선의 석가래 하며 그 규모가 상당했다.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렸다. 이몽룡을 만나는 춘향이 되어, “광한루”를 찾았다.
마침 <슈룹>이라는 드라마 촬영 중이어서 입장료가 없이 들어갔지만, 문제는 오작교를 건너 볼 수도, 광한루에 올라 볼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먼발치에서 보며 아쉬워했지만 월매도 만나고 그네도 타서 다행이었다. 판소리 한 자락 정돈된 숲길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광한루 한 켠도 정비 중이어서 길을 돌아 나오며 기념품 가게에서 친구는 목기 하나를, 남편은 부채 하나를 샀다. 그러면서 주인에게 물었다. 어디 마땅한 점심 식사를 할 곳이 있는지 하고..
길 건너에 ‘또바기’라는 백반집을 알려 주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남도 음식이었다. 한정식집 못지않은 가정식 백반. 백반 한상차림에 입이 떡 벌어졌다. 가성비 대비 최고였다.
또바기는 순우리말로 ‘한결같이’라는 뜻이다. 한결같이 음식을 내주시는 주인장. 남도의 음식 인심은 상호처럼 한결같다. 막걸리 한잔 곁들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운전을 해야 하는 친구 남편은 참자고 했고, 모두 동의.
차 안에서도 음식 맛을 감탄하며 도착한 둘째 날의 최종 목적지인 여수. 유튜브에서 ‘여수 밤바다’를 찾아 들으며 가는 곳. 호텔은 여수 엑스포 근처의 해안에 위치했다.
찰랑거리는 바다 물결이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 짐을 내리고 잠시 쉬며 여수의 오후는 어떻게 보낼까 궁리를 했다. 이럴 땐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고다.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갔다.
“저기 앞에 보이는 하얀 타워 있죠? 그게 케이블 카 타는 곳이고요. 바람이 더 불기 전에 타시는 것이 좋을 꺼구요. 케이블카 왕복하고 내려오시면 바로 터널이 있는데 그 터널을 빠져나가면 그곳에 거북선 다리 아래의 여수 낭만 카페들이 쭈욱 있어요.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시면 될 거예요. 아.. 오동도는 이 호텔 옆쪽으로 방파제를 쭈욱 따라가시면 나오는데요. 한 이십 분 걸으시면 되고요. 오동도에 가시면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 있는데 계단이 많아요. 낼 아침에 하시면 좋을 거예요.”
너무 친절한 여직원의 말을 메모하고 올라왔다. 여수까지 왔으니 바닷가 호텔을 잡았던 것뿐인데, 모든 볼거리들이 바로 이웃해 있었다.
케이블카 발 밑으로 보이는 섬들. 한려수도의 일부분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작은 섬들과 커다란 선박들, 알록달록 색을 띠고 있는 도시의 풍경들. 가슴속에 담아두고,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셀폰 카메라를 쉬지 않고 눌렀다. 케이블카 흔들림 속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 한려수도의 그림 한 폭이 이어졌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터널을 지나 여수 낭만포차에 도착할 무렵 다시 가랑비가 내렸다. 거리의 포장마차도 좋겠지만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건물 안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젊은 부부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삼합도 좋지만 조개구이를 꼭 먹어야겠다는 나의 의견에 두 가지 메뉴가 함께 가능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여수 막걸리로 저녁식사는 시작되었다. 삼합이 끓는 동안 열심히 조개를 굽고 어두워진 밤바다를 감상했다.
이게 여수 밤바다구나… 장범준의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부르는 노래. 남편은 처음 들어보는 노래라고 했고, 친구는 따라 불렀다. 막걸리 잔 부딪히는 소리가 여수 밤바다로 스며들고 두 남자는 열심히 먹고 마셨다. 나중에 볶음밥까지 시켜 먹고서야 우린 자리를 떴다.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남편은 택시를 불렀다. 이유는 취했고 비도 좀 뿌린다는 핑계로.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친구는 걷고 싶었지만 이미 택시는 가게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도착한 호텔 방에서는 2차가 이어졌다. 새우깡과 꼬깔콘, 남아 있던 피칸이 안주의 전부였지만 친구 남편은 많이 마셨다. 난 열심히 안주만 축냈고, 남편은 맞장구를 쳐 주었다. 11시, 다음날 아침 오동도를 걷기 위해 그만 자야 하는 시간이었다.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과 작은 파도 소리들이 자장가 되어 흐르는 밤. 또다시 다음 날을 기대하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