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맑아라
이충희 시인 유고시집 출판회 & 추모 문학제
이런 행사가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당일 아침이었다. 동해 문협의 회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마침 일요일 오후, 약속은 없었고, 기꺼이 함께 가자고 했다.
이충희 시인은 내 선친의 제자이며, 엄마의 후배이시고, 나의 초등학교 은사님이시다. 처음 글짓기 지도를 해 주셨던 선생님이셨고, 글쓰기 재능을 제일 처음 찾아 주셨던 분이다.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날 때도, ‘한글로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현지에 적응하려고 한국말을 멀리한 채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영어에 조금 적응이 되었을 때 우리말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엄마를 통해 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선생님은 참 좋아하셨단다. 아버지를 닮아, 글을 잘 쓸 거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한국에 나올 때면 가끔 만나 뵙고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지만 지난 몇 해 동안은 엄마는 요양원에 계셨고 선생님은 투병 중이어서 서로 연락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봄, 선생님의 작고 소식을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강릉의 명주 마당 행사에서 그분이 옆에 계시는 듯 다시 뵙게 되었다.
1부에서는 세분의 패널이 나와 그분의 시 세계와 강릉 문인 협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셨는가를 잘 알려 주셨다. 패널 중 한 분이셨던 한 시인은 이충희 시인의 시 세계를 너무나 잘 표현해 주셨다.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인. 야생화를 그린 80여 편의 시. 성찰의 시. 삶의 이치와 자연의 조화를 말하는 시. 시를 애인인 듯 사랑하셨던 시인. 거침없이 주술사처럼 표현해 내는 시를 읽고 있으면 죽비에 맞은 듯하고 시를 사랑하는 열정에 화상으로 덴 것 같다’고 하였다.
이어서 2부에서는 시인들과 낭송가들이 낭송해주는 그분의 시들. 유족들의 말씀. 유고집 증정 등 의미 있는 일들로 이어져 갔다.
금방이라도 옆에서 “지은아, 외국에서 고생 많다. 그래도 글은 계속 쓰지?” 하시는 것 같았다. 눈물을 훔치며 아픔도 같이 하며 그분을 추억했다. 나의 국민학교 5학년 시절, <어린이>라는 잡지에서 공모가 있다며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나름 꽤 긴 글을 썼고, 보시고는 이 정도면 됐다 하시고 공모에 보내 주셨다.
그리고 그 글은 전국에서 장원. 이 작은 시골 국민학교에서 큰일을 했다며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그 후에도 명주동 선생님 댁으로 가끔 찾아갔다. 글짓기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엄마와는 각별한 사이셨고, 내 결혼식에도 오셨고, 동해시 무릉계곡에 선친의 시비, <낙조>를 세우고 제막식을 할 때도 오셔서 축시를 해주셨다. 그리고 십 년도 더 지난 어느 가을, 신동아에서 논픽션으로 상을 탔다는 내 소식을 듣고, 축하 엽서 한 장을 보내 주셨다. 참 감사했다. 사는 동안 선생님의 잔잔한 정을 늘 기억할 것이다.
다음날 추모문학제 프로그램과 유고시집을 가지고 엄마 면회를 갔다. 소리는 갈라졌지만 천천히 한자씩 읽으셨다. 그리고는 이충희 시인이 누군지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문학제’라고는 또박또박 읽으셨다.
전화기에 있던 선생님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 드렸다. 그제사 엄마는 “ 어디 있나?” 하고 정확히 물으셨다. 이충희 시인의 얼굴을 알아 보신 것이다. “하늘나라에…”라고 답을 했다. 그 뜻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는 확실히 이충희 선생님의 얼굴을 기억하신 것이다. 사위 얼굴도 기억 못 하고, 외손주 얼굴도 기억 못 하시는데 선생님의 얼굴을 기억하시는 것은, 엄마의 후배고 또 많이 아끼셨다는 뜻이리라. 엄마의 옛 기억에 남아 계신 이충희 시인. 그 맑고 고운 시처럼 하늘나라에서도 잔잔한 들꽃으로 곱게 피어 계시겠지.
강릉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시인으로 사셨던 선생님을 기리며 이 유고집이 나오기까지 애쓰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리고 싶다. 이렇게 의미 있는 행사에 나그네처럼 찾아와, 마음을 올려 드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시인을 추모하며 유고집의 책 이름으로 쓰신 시 전편을 올린다. 표지도 시인이 그린 것이라 하니 그 의미가 더 하는 것 같다.
하, 맑아라
-이 충희-
서창으로 바람결 겨운 하오
풀여치 가락 따라 들어온
보송보송한 햇볕에
오랜만에 탈고한
詩 한편 널어놓았더니
마득찮던 행간에서
신통하게도 톡톡 새움이 트듯
詩語가 돋아나
모자란 필력을 일으켜 세우는
처서 지난 이튿날
하, 맑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