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다 보면 가장 힘든 일이 풀 뽑기다. 특히나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나에게 풀은 공존하고 싶지 않아도 공존할 수밖에 없고, 뽑고 싶지 않아도 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도 살아보겠다고 자라는데 내가 키우는 작물 옆에 자란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뽑아버리니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뽑고,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한다. 개망초, 애기똥풀, 명아주, 질경이, 토끼풀 등 제 나름의 이름이 있는 풀인데 ‘잡초’라는 이름으로 뽑혀야 하니 풀들의 짧은 생에 미안할 뿐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풀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할 대상일 수 있다.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랑스럽고 예쁜 풀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농부들에게 풀은 뽑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논과 밭에서 자라는 풀은 작물에 공급하는 양분을 빼앗고 햇빛과 바람을 막아 작물의 생장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그 중엔 생명력이 질겨 뽑아도 다시 뿌리를 내리는 풀도 있다. 그래서 풀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김수영 시인은 그의 시 “풀”에서 비를 불러오는 동풍에 나부껴 눕지만 결국엔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것이 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풀은 거센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존재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작물 옆에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고, 더 강한 풀들이 자란다. 지난 봄에 취나물을 뜯을 때 취나물과 비슷한데 갈수록 더 커지고 뾰족해지는 이름 모를 풀을 보았다. 그 풀이 어릴 때는 취나물과 여간 비슷한 것이 아니어서 취나물인 줄 알고 뜯을 뻔했다. 그런데 커갈수록 취나물과 다르게 나물 안쪽에 하얀 솜털이 자라고 잎도 더 뾰족해지고, 줄기도 강해지는 걸 보았다. 그때는 취나물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또 모를 심으면 모 옆에는 모랑 거의 비슷한 모양의 풀이 자란다.
작년엔 논에 풀이 많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우렁이농법으로 무농약쌀을 재배하는데 우렁이들은 짝짓기하느라 바빠서인지 도통 풀을 먹지 않았다. 모가 한 줄로 시원하게 자라야 하는데 모와 모 사이, 모 바로 옆에서 모와 비슷하게 자라는 풀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물여뀌라는 풀은 모보다 키가 커서 모가 자라는 걸 방해했다. 햇빛을 가리고, 모의 뿌리까지 침범해 자기 영역을 넓혀가서 뽑느라 애먹었다. 뿌리가 얼마나 질긴지 물여뀌를 잡아 뽑느라 아직도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런 노력에도 논농사 결실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올 여름은 무성한 풀과 함께하며 보낼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들이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아이고, 풀밭이네, 풀밭. 뭐 먹을 게 있겄어? 약이라도 쳐야지.” 시골에 내려와 산 지 16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풀과 함께 살아가는 게으른 농부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게을러서 풀을 키우면서도 미안해서라고 변명만 해대니 풀들도 웃길 노릇이다. 그래도 풀과 함께 살아가는 시골에서의 삶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 곧 장마가 시작되면 텃밭의 풀들은 시원하게 비를 맞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