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간다
지난 3월부터 우리 마을에서는 ‘나의 이야기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년에 부여의 한 마을에 선진지 견학을 갔다가 우리 마을에서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모아져 시작한 프로젝트다. 마을 어르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리는 짧은 이야기책을 만드는, 일종의 마을 동아리 모임이다.
부여 마을에서는 마을 전체 어르신들이 2년 여에 걸쳐 꾸준하게 모임을 갖고 지원도 받아 23권의 그림책을 출간했다. 또 그림책 만드는 사단법인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함께 마음을 모은 세 명의 젊은 주민이 모임을 시작했다. 같이 살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인생을 그냥 묻어두기엔 아까웠기 때문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고, 이제 늙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자신을 낮추신다. 70-8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축적된 삶의 지혜가 많으신데도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겼으면 했다. 세상이 보기에 그럴 듯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삶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정직하게 땅을 일구고, 자녀들을 키워내신 분들이다. 그 자녀들에게, 손주들에게 자신의 인생이 담긴 책 한 권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다면 그보다 귀한 일이 있을까? 또한 그러한 개인의 역사가 모여 마을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70-80년 인생의 아주 적은 한 부분의 역사를 기록한 그림책, 이야기책이지만 말이다.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많은 준비 없이 3월에 모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모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지 몰라 조심히 글자 따라쓰기와 선을 따라 그림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첫날 오셨던 할머니 두 분은 시 읽기도 부담스러우셨는지 바로 포기하셨다. 읽지 못해도, 쓰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다. 안타깝지만 한 번 마음 먹은 할머니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대신 그 다음 주엔 다른 할머니와 아줌마 한 분이 함께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서 70대는 할머니가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거동이 불편해 마을회관에 직접 찾아오기 힘든 80대 후반의 어르신들은 직접 댁에 찾아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필해서 짧게 글을 써야겠다고 논의했다. 의외로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모임 인원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아저씨 한 분이 요즘 농사로 바쁘시다고 나오지 않아 지금은 80대의 할머니 세 분과 70대의 아줌마 두 분이 참여하신다.
시간이 갈수록 어르신들과 내적 친밀감이 쌓여간다. 매주 어르신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우리 사이를 좀더 가까이 끌어당긴다고나 할까. 그 이야기들은 삶의 아주 작은 일부이지만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과 가정환경, 가족사들을 통해 좀 더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한 웃음과 감동이 2시간 여를 가득 메운다. 쑥스러운 듯 옛날 이야기를 꺼내다가 목이 메어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다시 옆에 있는 할머니의 농담 한 마디에 까르르 웃어댄다.
어르신들이 꽃처럼 자신을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라는 동요를 같이 부르고, 꽃에 대한 시를 써보았다. 가정의 달을 맞이해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손주에게 생전 처음 편지를 써보기도 했다. 그림도 얼마나 잘 그리시는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 그리는 건 처음이라고 하시면서도 물의 농도를 잘 맞추고 물감붓으로 색칠도 잘하신다. “난 못해. 아이고, 난 못 그려” 하고 매번 못한다고 하시던 어르신들은 이제 서로 “노작가”, “박작가!” 하고 부르신다. 마음이 뿌듯하다. 이제 조금씩 어르신들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시는 게 보인다. 어버이날에 찾아온 자녀들도 엄마의 글과 그림을 보고 “천재!”라고 하고, 엄마의 그림을 자랑스럽게 벽에 붙여 놓았다고 하신다.
아직 출판하기까지 인쇄비용이나 디자인 등의 문제가 남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소중하고 귀하다. 가능하다면 어르신들의 글과 그림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어엿한 작가가 되어 자신을 더 자랑스러워하고,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