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네기 Jul 03. 2022

2022년 7월 2일

결혼식, 전시회, 자존감

 고등학생 시절은 좋은 기억 뿐이다. 선생님들도 좋았고, 친구들도 모난 구석이 없고, 학교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어있었다. 요즘들어이 시기에 내 자아가 형성되었음을 생각하게 되는데,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력을 받아서 은연중에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 같다.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젠 연락이 끊긴지 오래인 인연들도 많지만,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고마운 사람들뿐이다.

 취업 준비 시기에 연락이 끊겼다가, 작년말에 은사님들께 연락을 드렸다. 그 이후로 종종 안부를 전하고 있는데, 스승의 날에 한 분께 또 연락을 드렸다가 한 은사님의 따님이 올해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그 따님이 직장 선배이기도 하고, 친한 선생님들도 결혼식에 참석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어서 나도 결혼식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따님과는 아직까지도 대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선생님의 따님'과 '직장 선배' 중 하나에만 해당됐다면 결혼식까지 가진 않았을텐데, 예식을 서울에서 하기도 하고 친한 선생님들도 오신다고 하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결혼식 전날, 내게 결혼식 소식을 알려준 선생님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서울에 오지 못하게 됐다. 나는 이미 회사의 같은 팀 상사로부터 축의금 전달까지 부탁받아서 결혼식에 꼭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선생님들이 못 오시면 축하만 드리고 끝나겠다는 생각에 좀 시무룩해졌다. 다행히 원래 오시기로 했던 선생님 세 분 중 한 분은 그대로 올라오시고, '서울 초보(?)'인 그 선생님을 부탁받아서(?) 서울 일정에 어울리게 되었다.


여기가 교회라는 것을 더없이 잘 드러내는 벽화였다. 목요일까지 비가 오고, 주말이 지난 뒤에도 비 예보가 있는데, 정말 놀랍게도 결혼식 날씨는 아주 좋았다. 기도의 힘인가.


 결혼식은 교회에서 진행됐다. 결혼식에 참석한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하는 결혼식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입구부터 성스러움이 한껏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예배당에는 거의 15년만에 들어갔는데, 아무래도 평소에는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방문했던 결혼식장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음향시설이 잘 갖춰져있어서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도 상당히 괜찮아보였다. 아마 예배일에는 단상에 합창단이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 않을까. 웅장한 파이프오르간도 멋졌는데, 예식 말미에 신랑과 신부가 행진할 때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하는 것을 들으니 그 웅장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다. 다만 축사와 축도 등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과 중간중간 '아멘'하는 타이밍은 생소했다. 같이 있던 선생님이 교회에서 결혼하려면 결혼식 전에 미리 공부해야한다고 하셨는데, 그 공부의 필요성을 알 수 있었다.

 사진까지 찍지는 않고 혼주이신 선생님께 인사드린 뒤 교회를 나왔을 때, 또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꾸준히 지리를 가르치셨는데, 나는 수능에서 세계지리까지 응시했기 때문에 더욱 많은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이었다. 죄송하게도 졸업 이후에 전혀 연락을 드리지 않았는데, 선생님께서도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셨다가 내가 신부와 같은 회사에 다님을 알고 일부러 연락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또 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다시 교회로 들어가 잠시 인사를 드렸다. 예순을 넘긴 연세에 박사과정을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대단하고 멋졌다. 서울에 자주 왕래하신다고 하시니, 머지 않은 미래에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식 전에 내가 들었던 선생님들의 일정은 결혼식 - 예술의 전당 - 양재카페거리 - 귀가였다. 선생님이 한 분, 6살짜리 아이와 함께 오셔서 서울 계획을 어떻게 세우셨을지 궁금했는데, 결혼식 이후에 예술의 전당에 가는 계획은 그대로였다. 어린 아이가 함께 있으니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오전에는 아이가 서울 지하철을 타고 싶어해서 선생님이 수서역에서 예식장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셨지만, 한 번이면 족했나보더라. 예술의 전당에서는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 뮤지엄'이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앤서니 브라운은 유명한 아동 문학가인데, 나는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이 작가의 책을 읽진 않았으려나. 아무튼 아동 문학가에 대한 전시인만큼 공간도 작품도 아기자기하고, 아이들도 많았다. 

배경에 인파가 모여있는데,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는 줄은 아니고, 아이들을 위한 예술 체험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다. 전시 공간에는 토요일 낮임에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 다니던 전시와는 결이 다르긴 했지만, 오히려 그게 새롭고 재밌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알기 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점점 굳어지고 상상력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작가가 온갖 상상과 영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둔 그림들을 보며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을지 돌아보는 것이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는 그림과 같은 상상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처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관람객 중에는 아무래도 아이와 동행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수많은 아이들의 텐션을 견딜 수 있다면 어른도 와서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여운 그림도 있고, '셰이프 게임'으로 표현한 그림들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 같은 재미도 느낄 수 있더라.

고릴라가 손에 작은 고양이를 올려두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림보다는 전시관의 여러 영상과 설치물들에 더 흥미를 가졌던 아이를 데리고 관람을 마친 뒤, 예술의 전당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가서 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굉장히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대면한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백이 길었던만큼 쌓여있던 얘기도 많아서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참 좋은 관계인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거쳐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아를 확립해가고 있었고, 선생님은 결혼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을 대하는 자세에 여러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만 해주셔서 자존감이 한껏 고양되는 시간이었고, 앞서가는 인생 선배로서의 모습이 보일 때에는 그저 대단해 보이면서도,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한 장면을 미리 엿보는 것 같아서 흥미롭기도 하고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전히 나 자신만 있던 인생에서, 결혼과 육아를 거치며 인생의 무게중심이 옮겨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 결국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아직까지도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그저 대학입시와 취업을 준비하며 참고하는 기록이 아니라 온갖 좋은 말로 가득한, 평생 간직할 선물을 받고 졸업한 것 같다. 정말 내가 고등학생 때 이렇게까지 살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이걸 쓰는 동안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노력을 쏟았을지를 생각하면 괜히 죄송하고 감동스럽다. 요즘은 자존감이 더 없이 좋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이번에 선생님들을 만나서 보낸 시간들은 그런 자존감을 더욱 고양시키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광주에서 올라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일이 왕왕 있을 것 같으니, 서울 곳곳의 좋은 장소들을 물색해야겠다.


우선 별마당 도서관이나 가봐야지. 사람이 많지 않으면 좋겠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