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2022. 3. 20.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최근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시회 다니는 것이 취미라는 말을 여기저기 뿌렸더니 주말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박물관을 갈 계획을 세웠다. 기념할만한 첫 번째 전시회는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 좋겠다는 생각에, 또 국박을 찾았다. 가고 싶은 전시회가 열리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지난 수년 동안 나의 경로의존성이 더욱 심해졌는지, 국박이라는 장소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서 하는 전시회를 알아봤다. 여하튼 다행히 특별전시실에서 하고 있는 전시회는 나름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였다.
서울에서 새로 지내게 된 곳은 중심지의 변두리쯤이라서, 국박까지는 걸어가려면 걸어갈 수 있을 거리였다. 돌아올 때 시간을 확인하니 딱 1시간이 걸렸는데, 돌아오는 길은 힘들더라. 언젠가부터 도보 30분 정도 되는 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고, 도보 1시간까지는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늘어지는 신체에게 최소한의 운동량을 부여하기 위한 발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걸어갔다. 숙소에서는 감사하게도 식사가 제공되지만, 휴일에는 아침 겸 점심이 오전 10시에 나오기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나와서 아침을 밖에서 해결했다. 서울생활을 재개한 지 아직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근처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서울 도심을 한 시간이나 걷다 보면 아침을 가볍게 때울 가게 하나 정도는 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별 계획 없이 나섰다.
출발한 지 10분 남짓 되었을 때 발견한 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가볍게 요기하고, 흐린 날씨에 미세먼지가 가득한 길을 걸었다. 첫나들이에 대한 의미부여는 딱히 안 했지만, 막상 나갔는데 회색만 만연하니 살짝 김이 새긴 했다. 그래도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는지 거리에 사람은 별로 없었고, 10시에 국박이 개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매우 느긋하게 걸었다. 아침에 국박으로 가는 길도 1시간은 걸렸겠지만 아직 팔팔해서 그런지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신용산역을 지나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천 원을 주웠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일단 챙겼다.
국박에 도착. 개관시간에 맞춰서 국박에 간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일요일 개관시간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국립중앙박물관인데, 내가 너무 얕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10시에 문이 딱 열렸는데, QR 체크인을 하고 금속탐지기(언젠가부터 이걸 좀 철저히 하고 있나 보더라)를 통과하니 10분 정도가 지났다. 특별전은 시간대마다 인원수를 정해두고 인터넷 예매와 현장 구매를 병행하고 있는데, 사람이 많아 보였음에도 다행히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입장하자마자 특별전시실로 향했다.
아마 14년부터 18년까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간송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했던 적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덕분에 10회는 족히 넘는 연속적인 전시회를 꼬박꼬박 챙길 수 있었다. 중간에는 페이스북에서 하던 이벤트에 당첨까지 돼서 공짜로 다녀오기도 했다당시엔 군인이었어서 표값보다 교통비가 더 나오긴 했다.). 아무튼 그 전시회들 중에서 특히 마지막 전시회가 기억에 남았는데, 전시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시회는 정해진 공간에 전시물들을 전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그게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주제에 대한 전시물들을 나열해두고, 그에 대한 해설이 조금. 하지만 갈수록 과거의 유물만이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아트를 함께 전시하기 시작하더니, 돌연 전시공간에 자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당시에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가 특히 그쪽에 관심이 많았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내 시야가 넓어진 것도 있겠지만, 전시회에 가는 것이 보다 복합적인 경험이 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만족스럽고 좋은 변화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옻나무에서 옻칠을 채취하고 도료로 만드는 작업 과정을 동영상으로 소개하는데, 스크린을 여러 겹으로 배치하여 색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즉 단순히 아시아 각국의 칠기들을 전시해두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 전시 기획자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내부 공간도 칠기에서 가장 흔히 드러나는 색깔인 검정과 빨강을 활용하여, 테마가 확실히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중간 동영상을 틀어놓는 공간도 단순히 칠기 제작과정이나 무역 경로를 통해 세계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영상예술로 승화해냈다.
오랜만에 간 전시회라 그런지, 유독 시간을 많이 들여서 전시물을 하나하나 뜯어본 것 같다. 수년 전에 리움미술관에서 했던 나전칠기 전시회를 보고 그 화려함에 매료되었는데, 이번에는 전시물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서 좋았다. 나전칠기는 물론이고, 장식이 덜 화려한 칠기, 다른 나라의 칠기들도 있어서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일본의 칠기.. 마키에(蒔絵)라는 단어를 전시회에 오기 전에도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은데, 금가루가 아낌없이 뿌려져서 정말 화려했다.
전시 마지막쯤에는 옻칠을 이용한 현대의 예술작품들도 몇 가지 전시하고 있었다. 공예를 볼 때마다 그 세밀함을 보며 장인들의 섬세함에 감탄하곤 하는데, <빅뱅>이라는 작품은 그런 부류에 속했다. 작품에 딱 붙어서 사진을 찍고 그 세밀함에 대해 찬사를 아낌없이 주시던 다른 관람객이 없었다면 좀 더 느긋하게 봤을 텐데, 텐션을 내가 견디지 못해서 슬쩍 보고 나와버렸다. 아, ‘삼베에 옻칠’이라고 설명되어있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는 작품이 내가 아는 삼베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신기했다.
전시회를 스윽 둘러본 뒤에는, 나도 국박을 상당히 오랜만에 와본 거라서 바뀐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반가사유상 2점을 한 공간에 배치한 사유의 방이라는 곳이 생겼대서 그곳을 가보고, 서화실만 좀 돌았다.
예전에 금동 반가사유상은 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금동 반가사유상 두 점만 따로 한 공간에 배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아예 이를 위한 공간이 박물관 내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만큼 인지도도 높고 많은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겠지. ‘사유의 방’은 최근의 전시회가 그러하듯이, 도입부에 영상예술이 재생되고 있고, 내부로 들어가면 살짝 경사진 길의 위쪽에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학부에서 이런저런 수업들을 듣고 난 뒤에 다시 본 반가사유상에는 비슷한 점과 함께 확연한 차이점들이 보였는데, 이것도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서화실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다만 상설전시관에도 미디어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침에 걸어온 것부터 꽤 오랜 시간을 서있기도 했고, 마침 재생되는 영상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어서 3분짜리 영상을 2번 봤다. 실제로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이 섞여있어서,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게 박물관 곳곳을 돌았더니 밥때가 되기도 했고,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입장하면서 봐 두었던 모금함에 아침에 주웠던 천 원을 넣고, 미련 없이 박물관을 뒤로했다. 이젠 정말 가까이 사니까 자주 올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