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2022. 6. 5.
2014년 가을에 처음으로 간송미술관에 갔고, 그동안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했던 간송문화전은 꼬박꼬박 갔지만, 간송미술관 보화각을 다시 방문한 것은 이번이 어느새 8년만이다. 처음 갔을 때에는 추사의 서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좁은 전시실의 사방을 도배하듯 채웠던 작품들과 그 공간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상경 후 처음으로 소규모 전시회를 갔던 것이었을텐데, 정말 인상 깊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8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미학 복수전공을 선택했고, 동양화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여 미학과 전공보다는 타과에 있는 동양예술 관련 수업들, 심지어는 한문강독 수업 등으로 졸업학점을 채운 뒤 정선의 작품으로 미학과 학부 졸업논문까지 썼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뒤에, 새내기 시절에 방문했던 간송미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미술관도, 나도 많이 변해있었다.
지난 8년 사이에 보화각은 한층 더 낡아졌고, 나는 정선과 진경산수화에 대해 더 이상 민족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학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그리고 졸업논문을 쓰면서 정선을 필두로 하는 진경문화가 최완수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간송학파’에 의해 주장되며 후대에 민족적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제창되었다는 이야기에 설득되었고, 뿌리가 경제학도였던 나는 당시의 사회상, 특히 정선 개인이 처해있었던 경제적, 사회적 입지를 고려했을 때 그가 소중화주의라 하는 민족의 자존심을 고려하여 진경산수, 아니 실경산수를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접게 되었다.
생각의 전환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간송과 정선은 내가 동양화의 세계를 알게 된 고마운 계기였음은 변하지 않고, 특히 간송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이번과 같은 전시가 있으면 최대한 놓치지 않고 관람하는 것이 그의 업적에 대한 나 나름의 예우라 생각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예약을 못한 상태였다. 일단 찾아가서 비벼볼 생각으로 출발한 뒤, 지하철에서 예약 사이트를 들어가니 다행히 1장이 빠져서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예약을 못했으면 입장을 못할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전시실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아서, 느긋하게 구경할 생각에 2층을 먼저 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2층에 못 올라갔었는데, 이번에는 보수 공사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추사정화 전시 당시에만 2층을 막아뒀던 건지(내가 멍청해서 당시에 2층을 못 갔던 걸 수도 있다..) 여하튼 2층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작품은 없고 텅 빈 공간에 보화각에 대한 영상만 나오고 있어서 김이 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오히려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게 보화각 고별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보화각은 보수 공사가 들어가며 다시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는 것은 기약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1층으로 내려왔는데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0시에 칼같이 입장한 사람 말고 조금 늦게 도착하여 입장한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 2층 먼저 보고 내려가면 사람이 좀 빠질거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안일했다.
1층 전시실은 여전히 좁았고, 관람객을 잡아먹으려는듯이 공간을 알뜰하게 채운 작품들과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작품들을 구경했다. 신사임당의 포도나 김명국의 고사화 같은 유명하고 예전에 한 번쯤 봤을 그림들도 있었고, 이정의 인물화 같은 생소한 작품도 있었다. 탄은 이정은 묵죽이 워낙 유명해서 나도 묵죽만 봤었는데, 그의 인물화를 보니 또 신선한 느낌이었다. 간송문화재단의 전시에서 빠지면 섭섭한 정선의 그림도 한 점 전시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그림 설명에서 진경문화에 대한 언급을 발견했을 때에는 쓴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2014년부터 2016년까지의 간송문화전, 특히 마지막 6부는 군복무 중 페이스북 이벤트에 당첨되어 초대권도 받았었는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의 전시회를 개장시간 맞춰서 꾸준히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 다음 전시는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고, 이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남아있어서 이렇게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