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생활 -옆지기 #1
"오늘은 또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이 늦은 오후에."
옆집 울타리 너머에서 대니얼 아빠의 참견 섞인 안부 인사가 건네 진다. 남편은 그 인사에 응대하려고 텃밭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하며 울타리 쪽으로 걸어간다. 둘이서 무슨 말들을 한참이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남편은 평소답지 않게 호탕하게 웃기도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나는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주방 창문을 통해 귀를 기울였는데, 남자들의 낮은 톤 대화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 궁금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대화에 마무리지을 핑계를 던져주었다.
저녁 식탁에 앉은 남편의 표정이 기분 좋게 상기되어 보인다. 남자들의 수다도 여자들의 그것처럼 기분 전환이 되는가 보다. 저녁 식탁에서는 삼남매가 쏟아내는 하루 일과에 대한 이야기로 넘치니 남편과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호응해주느라 바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야 식탁을 치우면서 남편에게 물어본다.
"대니얼 아빠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어?"
"응. 대니얼 아빠도 뒷마당에 블랙베리 덤불을 다 갈아엎고 식물 심어 키울 거라고."
특별한 화젯거리가 있었던 게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그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아니, 뭐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도 했지. 그리고 내가 작년에 이사 오자마자 블랙베리 덤불을 다 엎어버리고 텃밭 만들었잖아. 그게 우리 타운하우스 사람들한테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집집마다 올해부터는 뒷마당에 식물 가꾸느라 더 활기차 졌다면서. 우리가 이사 와서 너무 좋대."
한 마디를 더 물어야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는 남편은 이제야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신나게 대답한다.
"오우 칭찬이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더니 다른 아빠들한테 모범이 되셨네요!"
"그런데 대니얼 아빠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거라기보다, 대니얼 엄마가 해달라고 했대. 하하하하"
왠지 이 부분에서 남편의 개구진 표정이 보인다. 나는 너무 즐거운 일이라 기꺼이 하는 것이지만, 옆집 대니얼 아빠에게는 아내에게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그저 퇴근 후의 '일'이 늘었다는 포인트가 재미있었나 보다.
"작년에는 야외극장 만들어 달래서 저렇게 멋지게 만들어 놓았는데, 올해는 텃밭? 다른 아빠들한테 모범을 보여준 게 아니라 일거리를 줬네."
남편은 근면 성실한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성실하게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는 일도 그런 류의 일이다. 남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핀다.
작년에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오면서 뒷마당이 작아졌다. 게다가 뒷마당의 절반은 야생 블랙베리 덤불이 차지하고 있었다. 트램펄린이나 그네를 설치할 수 없다며 아쉬워하는 두 딸들과는 반대로, 남편은 텃밭을 만들 계획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가 돌았다. 코로나로 외출 규제가 있어 바깥활동에 제약이 있던 때라 뒷마당에 텃밭 만들기 프로젝트에 더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지체 없이 돌아오는 주말에 장비를 사다가 단단한 가시가 돋아있는 블랙베리 덤불을 다 자르고, 2차로 삽질로 땅을 뒤집어엎어서 뿌리까지 없애버렸다. 다시는 내 땅에서 블랙베리의 잔뿌리 하나도 다시 돋아날 수 없도록 싹을 없애버렸다.
이런 수고로운 작업에 아빠 덩치만큼 큰 아들이 도와줄 법도 한데, 블랙베리 덤불 속에 뱀이 있을 것 같다는 핑계로 멀찍이 서서 심부름만 도왔다. 아들에게는 텃밭 만들기 프로젝트가 아빠만큼 흥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아빠가 하는 일을 도운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아빠가 하고 있는 작업의 과정을 사진과 기록으로 담아 학교 과제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들은 그 과제 제출로 A학점을 받아왔다. 학교 과제의 주제가 마침 <코로나 상황에서 집에서 할 수 있는 활동적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남편의 프로젝트를 이용하기에 제격이었던 것이다. 재주는 곰(아빠)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아들)이 받은 꼴이기도 하다.
두 딸들이 그네와 트램펄린을 놀 수 없어 아쉬워하던 것을 잊지 않고, 남편은 딸들을 위해 로컬 가드닝 센터에서 모종들을 사 왔다. 딸들이 좋아할 만한 블루베리 나무와 딸기 모종도 사 왔다. 초콜릿 민트향을 가진 허브 화분과 주홍빛 아고니아 꽃 화분도 사 왔다. 아빠의 깜짝 선물에 방방 뛰며 좋아하는 모습으로 화답하는 딸들. 남편은 아이들과 화분의 이름표를 만들어 함께 심고 앞으로 어떻게 가꾸면 되는지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런 남편을 보면 주변인들은 남편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남편의 그런 성실함이 언제든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남편의 취미 생활 같은 거다. 적당히 하라고 해도 스스로 자꾸 일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즐기는 사람.
어찌 보면 '성실'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정성스럽고 참됨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이다. 단,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남편이 블랙베리 덤불을 정돈된 텃밭으로 만드는 과정은 순전히 그의 취미생활이었다. 내가 좋아서 정성을 들여 하는 즐거운 활동.
그런 남편의 즐거운 활동이 나비효과처럼 주변으로 퍼지고 있었다.
나는 신선한 유기농 식재료를 얻을 수 있어 좋고,
아들은 시기적절한 때에 학교 과제에 대한 소재를 얻어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딸들은 식물을 키우는 즐거움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옆집과 그 옆집, 타운하우스 단지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남편의 성실함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성실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본다. 다행히 남편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생산적인 활동인 것에 감사한다.
남편이 가진 '성실'이라는 향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용히 퍼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