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대출정지를 먹었던 도서관 카드가 지금쯤 다시 활성화됐을 것이 기억이 나 무작정 잠옷바람으로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걷는 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정문을 나와 쭈욱 걸어가면 역에 붙은 영풍문고가 나타나고, 왼쪽을 향해 걷다 보면 동네 도서관이 나온다. 내가 평소 가는 길은 보통 앞을 향해 바로 나있는 길이었다. 책에 연필로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레 도서관보다 책방이나 서점을 찾게 됐다. 그 모든 이야기가 통째로 내 것이 된다는 희열은 같은 돈을 주고 먹는 한 끼 식사보다 훨씬 값지다. 밖에서 먹는 식사비를 아끼고 주린 배로 책 한 권을 손에 품는 황홀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기에.
그렇지만 신간의 늪에서 더 많은, 더 다양한 책을 따라간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덜컥 샀다가 더러 후회하는 책도 있고, 신나게 밑줄은 그었지만 알맹이가 없어 불현듯 팔고 싶어 지는 책들도 한두 권이 아니라, 슬슬 사는 것보다 읽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어 졌다. 어쩌면 그동안은 글보다도 글을 따라 이어지는 연필촉의 세계가 더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초가을의 냄새를 폴폴 맡으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공을 차는 아이들과 한쪽에 모여 수다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하늘이 비추는 노란 조명에 담겨왔다. 의식하지 않고서야 목적지만 보며 걷는 사람이라 평소라면 자연스레 지나갔을 길. 오늘은 그런 길을 찾는 게 좋았다. 혹시 오늘의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걸까, 3분 정도 더 걷다 보게 될 도서관의 굳게 닫힌 문을.
대부분의 도서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란 걸 왜 한 번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3초면 휴관일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에서 손보다 발이 더 빨랐던 나는 머릿속에 적어두었던 많은 책을 몸속 어딘가로 욱여넣고 왔던 길의 반댓방향으로 발을 옮겨야 했다. 사람들을 비추던 노란 조명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만큼 찰나의 시간을 지나온 것이겠지.
모든 일에 나름의 목적이 꼭 있어야 하는 의미론자인 나는, 결국 다시 돌아가는 이 길을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막다른 길이라 도중에 다시 되돌아와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훑고 지나칠 수도 있을 테니.
한 블록 떨어져 난 작은 골목을 걸었다. 차 한 대 지나다닐 만한 도로를 가운데로 왼쪽에는 시장 골목에 있을 것만 같은 이름 없는 분식집과 거의 쓰러져가는 네일숍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영업을 알 수 없는 깜깜하지만 겉은 화려한 중국집이 있었다. 버려진 의자들, 빛바랜 가게 간판과 창문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할머니까지, 이렇게 복잡한 동네에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풍경이 모두 이곳에 담겼다.
짧은 골목을 지나며 나는 높은 건물들 사이에 놓인 빛바래고 헤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빛바랜 것은 빛이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니까, 그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지나온 무언가 니까 저무는 볕에 놓인 낡아가는 것도 그만한 존재가치가 있을 거라고. 우리의 세월도 그렇게 빛바랜 듯 낡아갈 것이며, 이것만큼 세월을 거스르는 아름다움도 또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