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서 Mar 17. 2023

외로움을 거쳐 유연한 삶을 얻었다

16일간의 짧은 혼자살이를 오늘부로 마무리한다.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혼자로 남고 어떤 말을 꺼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우리 집에서 보낸 홀로의 시간.

 

언젠가 일기에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해방'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땐 자유를 꿈꾸던 어린이였고, 지금은 해방을 사랑하는 어른이 되었다. 남이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는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앞으로도 안정적인 삶은 살지 않을 것도 같고. 


하지만 자유가 해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시간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연속성을 지녔지만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는 비교적 짧은 지속력을 가진다. 그래서 자유로운 삶, 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해방은 동일한 언어 선상에 둘 수 없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유에 책임이라는 단어가 부지기수로 따라다닌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했고, 지금은 자유로운 사람보다 저 자주 도망 다닐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는, 좀 더 소박한 욕심을 품은 인간이 되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을 잘 간파하는 사람이 나을까 아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이 나을까. 해내야 하는 것과 지켜내고 싶은 것 사이에서는 항상 큰 충돌이 인다.


혼삶의 초반에는 잠시도 집에 정적이 찾아오는 그 순간의 밤을 견디지 못했다. 배경처럼 사람들의 말소리가 계속 들려야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작은 소음에도 수도 없이 깨다 잠들었던 짧은 상해의 밤이 은은하게 떠올랐고, 그동안 전혀 인식하지 않았던 나의 집에도 계속 문이 잘 잠겼는지를 확인했다. 집에 돌아가는 저녁에는 계속 주변을 둘러보면서 최대치의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했다. 안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나를 보면서 떠나는 모든 출발이 겁나졌다. 나는 내 선택에 조금도 후회가 없지만, 그 순간순간적 공포는 언젠가 꼭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겠다는 걸 느끼다 보니 스스로의 미운 면을 자주 드러냈다. 겁내지 않는 건 내가 발견한 몇 안 되는 자랑이었는데. 


밤이 이유 없이 무서워질 때마다 음식을 해 먹었다. 만들어먹고 싶은 음식을 찾아보고, 직접 마트에서 재료를 사 오고, 요리소리를 배경 삼아 긴장을 내렸다. 우리는 계속 일어나지 않을 불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거라고, 그럼 어떤 삶도 살 수 없다는 말을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위안했다. 어느 때보다 멋들어지게 음식을 차리고 입에 꼭꼭 씹어 넣으면서 조금씩 순간을 환기하고, 그렇게 찍은 음식 사진은 잘 버텼다는 일렬의 증거처럼 갤러리에 남았다.(덕분에 살은 빠질 틈이 없다.) 지인들을 초대해도 돌아가면 꼭 남던 공허를 구멍 때우듯 결국 내가 조금씩 채워가는 수밖에 없었다. 


세 날을 빼고 전부 바깥으로 나갔다. 시간은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우선 외롭다 싶으면 나가곤 했다. 대부분의 암울은 은둔하기 시작할 때 더 커져가고 그 반경이 내 생활지일수록 암묵적으로 일상에 담기게 된다. 그래서 울적하기 짝이 없던 어떤 날은 다이소에 들러 맘에 드는 그릇을 사 오고, 이유 없는 자책이 길어지던 또 어떤 날은 봄공기를 핑계로 집 앞을 산책했다. 어느 날은 실패했다. 기분을 전환시키려고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었지만 확실히 집안에 담아두는 우울은 글에도 드러난다. 지난 일기들을 들춰보니 그랬다. 


혼자 산지 12일 차, 일정량의 암울이 섞이던 일기에 오늘 저녁은 무섭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이유가 있는 무서움이었고, 그 이유는 예상과 완전히 빗나 있었다. 

그냥 평소처럼 살았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집 앞에 카페 하나를 찾아 슬렁슬렁 걸어갔다. 미리 계획하기보다는 일이 끝나고 난 뒤의 시간을 기록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블로그를 적는, 굉장히 일상적이라 생각했던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문득 오늘의 밤은 날카롭지 않았다. 혼자 있다는 감각이 사라졌다. 내가 몇 인 가구로 살고 있는지 자각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그런 저녁.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하루를 다시 돌아봤다. 단순히 익숙해져서일까, 아님 혼자 사는 부담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사라졌나를 따져봐야 했다. 


결론은 그냥 내가 느끼기에 만족한 하루여서였다. 푹 자고 일어나서 해야 하는 일을 일찍이 마무리했고, 부담 없이 수업을 들었고, 빨리빨리 나가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고, 미루고 미루던 책을 다 읽었고, 원하는 글도 쓰고. 아직 해야 할 밀린 일들이 쌓여있지만서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사실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었다. 내 삶의 대부분은 퀄리티 낮은 잠과 부담 가득한 강의, 시간강박, 업무강박으로 시작되고 끝났다.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유연함이 해내고 나서야 진즉 대면했어야 했던 것임을 깨닫게 했다. 혼삶 느지막이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일련의 고독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거였다. 그제서야 앞으로도 또 다른 혼삶을 떠나러 가고 싶어 졌다. 내 강도에 맞는 지독히 혼자인 시간이 인생에서 꼭 한 번은 필요했던 것이다.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 꼭 가져야 하는 디폴트 값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해방구일 순 없다.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은 더 깊어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확장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적당한 외로움을 지나고 자각할 때 '~하는 자유' 혹은 '~하는 해방'에 대한 '~'을 찾을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을 무사히 지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이제 다시 나를 말할 수 있겠다. 오랜 시간을 돌아왔을 뿐, 작고 사소한 것에도 행복하다고 느낄 줄 아는 나와 유연하게 걸을 때 가장 빛나는 삶. 그 작은 커브를 트는데 22년의 시간이 걸렸다. 








작가의 이전글 그해 여름바다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