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프로의 세계
내 책상 정면에는 북페어에서 받아온 한 작가의 명함이 붙어있다. 단어를 적어서 문장을 완성할 수 있는 뒷면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낮에는 대학생, 밤에는 작가
아무튼 프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보는 게 믿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학창 시절 잘 쳐다보지도 않는 영어단어를 일일이 포스트잇에 적어 방 벽에 붙여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벽이 내가 깨고 잠드는 세상이라서. 잘 보이는 곳에 무언가 써두는 것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눈에 담게 되리란 희망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아, 영어단어는 끝까지 외면하는 일이 가능했다.) 나도 나의 희망을 적었다. 본업에 최선을 다하는 아침과 글과 고뇌하는 밤이라는 코웃음 나는 일상을.
코웃음 나는, 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해보기 전까진 진짜 쉬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글이야 자주 쓰는 거였고, 대학 수업은 애초에 요구하는 시간 안에서 잘 활용만 해도 되니까. 각자의 시간에서의 최선을 다해 이렇게 일 년만 지나도 꽤 큰 내가 되어있지 않겠느냐는 때 묻지 않은 확신이 있었다.
"아침엔 한 시간 정도 일찍 깹니다. 시원한 커피를 내리고 어젯밤의 흔적들을 제자리로 돌려놔요. 강의는 나중에 다시 공부하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해서 듣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느지막한 오후가 되는데, 짧게 복습을 마치고 이번엔 워드 파일을 열어요. 그때부턴 작가의 일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말들을 가장 잘 영글어진 단어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한 꼭지 정도의 글이 마감되고 얹힌 마음이 불쑥 가벼워집니다. 그 순간을 여유롭게 즐겨요. 단순한 하루도 반복하다 보면 꼭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깁니다."라는 휘황찬란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인간이 될 줄 알았다.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할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가볍고 실속 없는 줄은.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일상은 이상과 너무 먼 거리에 있다. 겨우 잠에서 깨 어떻게 흘러가는지 기억도 안나는 수업을 머리 한쪽으로 줄줄 흘려보내다가 이미 피곤해진 몸을 뉘이며 화면 속 사람들의 유머에 키득거리는 밤. 타협도 빠르다. 어떤 날엔 하루 정도는 쉬어가는 것도 좋으니까, 또 어떤 날엔 억지로 하면 스트레스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만 수두룩 늘어놓고 나면 자기 비관에 절여진 나와 함께 잠을 잔다. 젊으니까 그래도 된다지만 젊어서 더 부끄러운 청춘이라는 생각에 한없이 고개를 숙이곤 한다.
항상 이렇게 꿈만 큰 아이였다. 왜, 어떤 모습이 되어있는 나만 생각하고 그 사이 지점의 노력하는 본인은 없는 사람을 만나곤 하지 않나. 항상 내 포지션은 꿈을 크게 가지라는 어른의 표면 언어만 잘 듣는 쪽이었다. 되고 싶은 직업을 다 이어 붙이는 수고를 감당하는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좋아하는 책방에서 사장님과 그런 얘길 했다. "책은 쓰고 싶다는데 모아둔 글은 없는 사람들이 우리 같아요. 제일 별로인 거."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아마 자기 전 서로의 머리맡에 남았을 한마디. 끈기는 비슷한 결을 가진 우리가 갖지 못한 천부적 재능이라서.
바라는 미래만 번지르르한 인간은 항상 자기혐오에 발맞춘다. 높은 이상에 부응하지 못한 스스로를 꾸준히 자책에 떠넘기다가 이를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를 향한 미움이 정당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어서, 그렇지만 너무 부족한 지금은 어디서 드러내기도 부끄러워서. 연습 없는 글은 갈수록 완성이 어려워지고 과정 없는 강의는 미로에 놓인다. 그렇게 대학생과 작가의 동시직업을 꿈꾸던 젊은이는 어떤 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부끄러운 글만 선보이고 있다.
다시, 확실하게 를 새 목표로 내걸 필요가 있다. 밀렸다고 생각한 작은 일들을 청산하고 매일 조금씩 해내는, 욕심도 실속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해야겠다. 꾸준함은 그럼에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제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