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가져온 것들
가끔 우리의 시작 동기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각자의 다른 시작을 만든 단어들을.
나는 어려서부터 항상 이름에 많은 환상을 품는 사람이었다. ~단, ~회, ~장, ~부 같은 개인이나 그룹의 이름명에 혹했고 특별히 여럿을 대표하는 자리라면 더 그랬다. 이름과 직감에 생활을 바치는 삶. 미리 찾아보면 되는데도 기어코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어렴풋하지만 확실한 동기였다. 이름이라는 틀 안에는 사실 수많은 권력욕과 자아도취가 숨어있지만.
좋은 건 뭐든 가져내고 싶었던 어린아이는 자라서 아름답다 느끼는 이름에 여전히 집착하는 어른이 되었다.
대학에 와서도 이름에 대한 이유 모를 갈증은 계속됐는데, 새내기가 되자마자 호기롭게 지원했던 학생회가 그랬다. 학생회 회의가 있다, 회장님이 ~, ~부서가 ~ 같은 언어로 시작하는 말을 내뱉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 좀 멋있잖아. 뭘 하는지는 몰라도 이름이 주는 어렴풋한 동경의 세계가 분명 있었다. 나는 그 직감을 믿기로 하고 무턱대고 지원서를 냈다. 경력 따위 텅텅 비어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면접 일정을 확인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어서. "왠지 뽀대 납니다."라고 말할 순 없지 않나. 나도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며칠씩이나 반복했고, 고등학교 시절의 날 담보로 이용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실제로 그 시절 동경했던 풍경이라 마냥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라는 자기 위로를 곁들이며.
10-15분 남짓의 짧은 면접을 마치고, 며칠 뒤 '지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쉽지만, …'으로 시작하는 불합격 메일을 받았다. 당시 박탈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으나 한편으론 그동안 거절받은 경험이 많이 없어 당연히 하게 될 거란 생각도 했다. 겨우 이 정도 일에 할 수 없단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럼 대체 얼마나 알고 있어야 했지. 뭘 말했어야 했지. 우물쭈물했던 스스로의 얼굴이 떠오르면서도 거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다른 학교 학생회를 하는 친구까지 부러워했다. 난 그 이름이 갖고 싶었던 거였다.
나는 학과도 이름으로 갈 뻔했다. 중국 대학을 준비할 당시 유학생에게 적합한(난이도의 경우도 있었고, 정보의 한계도 있었다) 학과는 한정적이었다. 대학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학과 설명도 충분하지 않았고, 대부분은 선배들의 경험을 물어물어 알게 되는 식이었다. 충분한 앎 없이 내가 심취했던 이름은 '국제관계'였다. 어릴 적부터 '국제'가 들어간 모든 단어는 멋있다 판단해서였다. 국제기구, 국제단체, 국제산업, 국제업무, 국제사회 …. 말 다했지. 나는 또 구체적 이유를 차치하고 감각으로 로망을 익혔다. 그곳이 생각보다 우리가 짐작하는 배움과는 멀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내가 당연히 그 과에 들어갈 줄 알았다. 그 사실은 물어 들은 말을 들은 뒤 한참 인터넷을 열고 닫아서야 알게 됐다. 4년 청춘을 이름 하나로 지원하고 살아버릴 뻔한 것이다. 물론 해당 학과와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만큼 나의 습관성 환상 품기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행위가 주는 이름, 생활이 만드는 이름에 궁해있던 나는 지금도 그 언저리를 오간다. 어떤 공간도, 신청하는 모임도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됐다. 이름과 그것을 감싸는 분위기에 마음이 동하고 그 이름을 말하는 동안엔 일종의 카타르시스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름은 행위를 설명하고 가치관을 내포하고 펼쳐질 일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허상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실상이기도 한 것.
한동안 그런 충동적이고 본능만 강한 스스로에게 미움이 서렸다.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함이 담긴 이유들로 일상을 설명하고 싶었다. 정말 멋진 건 그런 확신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매함이 주는 힘은 가끔 혹은 자주 우리 나름의 이성보다 강하다. 이름에서 퍼진 상상으로 무작정 시작했던 것이 열 트럭을 넘어선다. 내 인생은 그 이름과 직관에서 태어났고, 이어지며, 변화했다. 그것은 '무턱 대다'라는 단어로 상용할 수 있으나, 삶에는 무턱대지 못해서 하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그래서 차라리 알지 못함을 사랑한다. 이름만 보고, 분위기만 보고, 감각만 익히고 시작했던 일들이 삶에 집을 이뤘다. 이름으로 기대했다가 후회하고 우회하는 상황도 생겼지만 해보기 전엔 분명 알 수 없었다.
실속 없는 사람이라 질책했지만, 어른 언저리가 되어가면서는 부쩍 계산하는 내 모습이 어색하다. 미리 확인하고, 위험을 최소화하고, 지레 짐작하는 행위가 실행까지 가는 덴 힘이 부치다. 복잡한 생각은 복잡한 상심을 낳고, 상심은 포기와 가까이 있다. 여러 번 다시 생각하다 놓쳤던 또 다른 수많은 이름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대책 없는 스스로를 질책하는 듯한 문맥이 난무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이 감각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글을 쓰는 곳도 그런 식으로 시작해 지금껏 유지 중인 거라. 꾸준하면 재능이 된다는데 직감도 꾸준하면 능력이 되지 않을까 라는 또 다른 직감을 들고. 또 다른 이름과 감각을 손에 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