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쪽 아랫입술에는 자주 잇자국이 생긴다. 행위의 기반에는 나의 싫은 것과 남은 더 낫다는 질투에서 온다. 낯선 사람들과 몇 시간 넘짓을 한 공간에 있다 보면 의식적으로 남고 마는 흉터.
자주 내 몸과 얼굴이란 겉면을 생각했다. 비교적 짧은 윗입술 때문에 앙다물어지지 않는 사이, 동그람과 네모남 흐릿한 경계에 있는 턱, 집중할 때면 한껏 내려가있는 입꼬리와 어스름한 그림자까지, 수많은 미움을 챙겨 보면서 나는 역시 나이 듦을 그 누구보다 미워할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수많은 긍정보다 한낮의 부정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은 스스로가 가장 자주 마주하는 면들 중 하나이며,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상대의 시선을 가장 큰 것으로 여긴 역사는 마치 거대까지 흘러갈 수도 있을 만큼 깊고 오래됐다. 나는 습관처럼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걸 즐기는데, 학생 시절에는 생김새와 그가 가진 몸으로 소위 ‘인기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유추했고, 그 기준이 무의미해진 지금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라는 더 모호한 기준을 추측하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경계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내가 본디 가지지 못했거나 있었으나 잃은 것’을 기준으로 했다. 나의 뼈들은 내가 본디 가진 것들이라 의술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는 영역이며, 갈수록 증폭되는 살들은 없었으나 생긴 범주에 있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는 스스로의 얼굴과 몸을 거울처럼 빗대어 상대의 행복 척도를 가늠하는, 관상가보다 더 혹독한 관상의 세계를 오고 간다.
내 몸에 붙어있는 것들이 증오로 차오를 때면 집에 돌아와 약간 튀어나온 오른쪽 앞니를 온 힘 다해 안으로 꾹 누른다거나 양 검지로 입꼬리를 올린다거나 각진 산을 둥글게 만드는 꾹꾹이를 한다던가 하는 의식을 진행한다. 마치 사잇공기에 들어있을 법한 액을 빼내는 살풀이를 거울 앞에서 치른다. 아주 거하고 성스럽게. 그러면 내일이면 조금은 나아져있을 거라는, 무속신앙의 마지막 단계인 희망이 빠져나간 액 사이에 가득 남았다.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을 가져다준 적은 없으나 빠진 자리가 사라진 적은 없어서, 대신 다른 걸 채운 채로 내일을 기다렸다. 그만큼 나는 내 겉을 증오하는 일을 아주 여러 번, 체계적으로 겪곤 한다. 그래서 내 사진첩에는 예쁨과 고의로 만든 못생김 사이에 모습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얼굴들을 휴지통으로 내보내는 건 내가 이따금씩, 혹은 그보다 자주 하는 정결의식.
그리고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남은 입 속 잇자국을 세어보게 됐다. 얼마나 자주 그 흉터가 생기고 사라지나 확률로 점쳐보기. 내가 믿는 신이 가르치는 반대의 삶을 그 누구보다 성실히 살아가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럼에도 나를 동요하고 감동까지 하게 하는 것은 아주 이상하게도 당당하게 드러내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꼭 내면에서 나타난다. 자연스레, 꾸밈없이, 부족함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 얼굴. 꺼내놓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냄새 같은 것. 나는 그런 얼굴들을 사랑한다. 내가 가진 게 아니라서. 나보다 더 자주 그들의 얼굴을 관목 하고 눈을 맞추고 그들이 보내는 향을 어렴풋하게 남긴다.
내가 사랑하는 얼굴들은 다양한 곳에 숨어있다. 얼굴들은 성별이나 종교, 직업, 재산, 나이 따위에 얽매이기엔 너무 고귀했다. 그런 면에서 어떤 고급 아파트 고층 주민에게서는 볼 수 없던 얼굴이 반지하에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나오는 이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테이블에 브런치를 한가득 올려놓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없던 얼굴이 버스 놓친다며 손을 꼭 잡고 뛰어가는 노부부에게는 오래 유지되고 있는 얼굴이기도 하다.
행복의 기인은 자길 잘 아는 거라서, 사랑하는 얼굴은 불행과 비교적 멀리 있는 얼굴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들이 흩뿌리는 향은 셔터 깜빡이듯 짧은 순간 뱉는 언어나 행동, 표정 혹은 자세의 사잇공기마다 머금어있다. 이를 테면 부족함도 서슴없지만 사려 깊은 언어로 드러내는 것, 자기 긍정이 드러나는 미소 혹은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 언어. 잘 앎으로 어떤 날에는 타협할 수도 있고 어떤 날에는 단호히 다른 의견도 내놓을 수 있는, 나는 그걸 '자기 유연도가 높은'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선 내 어떤 외부적 흠도 꼬집어 내지 않는 초연적 현상이 일어난다. 비로소 나와 너 모두의 모습을 관망하게 되는 상태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의 자기 존중이 나에게도 넘어오는 긍정 의미에서의 전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날이 올 때면 나는 평소보다 거울 속 눈을 더 제대로 마주할 수 있고, 최소한 나 해체하기를 피하면서라도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지인 K가 그랬고, 나의 애인이 그랬고, 고작 한 번 만나본 작가 S가 그랬고, 가게 주인 H 또한 그랬다.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나를 숙고하다 보면 간단하지만 가장 고되고 어려운 한 가지가 체에 걸러진다. 어떤 배경 속에 있어도 동일한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 그 단순함에는 나를 향한 사랑과 끊어진 질투와 비교라는 깊은 어려움이 수반되어 있다. 사실 그렇게 부러움에 타들어갈 것 같은 누군가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수려한 몸 혹은 사회적 위치조차 그 얼굴들보다 중요 위치에서 한참 멀어있었다.
오늘은 사랑하는 얼굴들을 더 오래, 자세히 떠올렸다. 오늘 밤에는 아랫입술의 흉터가 그리 선명하지 않을 것 같다. 떠올리는 것으로 위안이 되는 내가 사랑하는 삶의 얼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