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견한 묶음머리에 관하여
고통을 통해 배운다고, 그 식상한 말을 이해하는 날이 올 거라곤. 미안하지만 시나리오에 없었다.
일생에는 턱이 너무 많아서, 넘어가는 동안 가쁜 숨과 덜컹거리는 몸을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로 지대하다. 턱은 달리는 도로 중간중간에 서있지 않고 꼭 자갈길처럼 수도 없이 뻗어있다. 그래서 아파오는 엉덩이와 울렁이는 속을 참아내는 것이 일생의 중대사 중 하나가 되곤 한다.
그래서 이 길을 어떻게 달려왔냐고 하면, 영 버벅거렸다. 참아낼 힘이라는 게 없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지치면 지친 대로 더 가지도 못하고 울었다. 다음번엔 걸림 없는 영원한 길에 서길 바라면서. 애초에 그런 게 있을까 싶으면서도 무턱대고 믿고 싶었던 어린 나들이 지금의 나를 보며 서있다. 어느 날은 도를 지난 욕심에, 마음 같지 않은 친구와의 일에, 가능 없는 사랑에, 그리고 당장의 불운과 불행에. 그렇게 돌밭에서 하염없이 구르던 시간들.
남들보다 굵게 팬 어떤 굴곡들 사이에서 빨랫방망이를 두들기다 보니 초연해지는 날도 찾아오는 것 같다.
여전히 나의 마음은 위태하고 까스럽지만, 또한 그게 삶의 전반이지만 어떤 식으로 괴로워해도 알 수 없는 미래와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손에서 덜어내고 있다. 오늘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전과 후를 보다가 여기의 발을 볼 수 없던 거라서. 그런 삶은 마치 낭떠러지 끝에서 발을 이상한 곳으로 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야 어디로 갈지를 아는 것인데, 아주 당연하고도 본능적인 사실을 노력해 가면서까지 비껴가려 했다. 어리석음으로 해석하진 않는다. 가끔 내 뒤에 서있는 그 어린아이들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다다랐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고통을 극복하는 법'처럼 좋은 팁으로 가득 찬 글을 쓰고 싶다만, 그렇기엔 삶이 너무 복합적이다. 내가 이해한 방식이 사실은 그에 대한 답변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이따금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단편적으로 흘러가기엔 너무 많은 겹이 있다. 기록해 탐구하는 일 같다가도 한 발치 멀어지는 일 같고, 다 집어치우고 도망치는 일 같다가도 한 걸음 가까워지는 일 같다. 어쩌면 이걸 했더니 이런 변화가 생겼어요 하는 단편적인 서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닐까. 콧김 불듯 가까운 거리에서 비치는 눈썹 개수를 세고 있다 보면 오히려 아주 먼 우주가 보일 때가 있다.
행복에 관해 말을 아끼는 이유는 지속되고 있다고 단언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박복을 말하면 어쩐지 계속되는 기분이 없는데, 행복은 유독 그렇다. 희비는 유독 전환이 빠른 건데 행복하다고 말했다가 몇 시간 후면 다시 사그라들면 어쩌지. 그땐 이 엇갈림을 어떻게 설명하지. 우린 결국 마지막 언어에 초점을 맞추곤 하니까 '힘들었는데 좋아졌어요.'가 '좋았었는데 힘들어졌어요'보다 나아 보였다.
결국 고통은 보편적인 것, 행복은 비밀스럽고 허투루 말했다간 솔랑 날아가버리는 것. 내가 이 세계를 설정한 기본값.
말했다고 꼭 이루어야 하는 게 되는 건 아니라고 누가 그랬다. 조심스러움이 탈로 났는지, 어쩐지 그가 속까지 뻥 뚫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세계가 확장된 건 바로 그 들켜버린 비밀에서부터였는데, 행복에도 발을 달아도 괜찮은 거구나 해서였다. 위기를 감각하고, 대처하고, 그런 일엔 다분히 소질 있었지만 만끽하는 일은 전무했던 이유. 행복엔 발을 달아두지 않아서. 자갈밭에 불행만 뛰어다니고 있어서.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사람이 사슴의 발빠름을 이야기했다.
눈앞엔 여전히 미해결 소설로 남아있는 어려움이 속속들이 박혀있다. 안간힘으로 빼낸 것도 아니고 메꿔보려 긁어내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초연해진 건 행복이 머리를 묶고 있어서. 아직 신 한 짝도 안 신었는데 걔가 그렇게 대견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