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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Jul 14. 2023

부러진 다리로 뛰는 일

학기가 끝난 지 3주쯤 되었다. 처음 일주일은 그동안 잔뜩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그간 가장 긴 칩거생활을 했고, 이후엔 사람들을 만나다가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바빴다. 사실 '바빴다'의 진짜 어원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 같다. 쓰는 일을 회피했고 일기가 밀려갔고 집안에서는 책을 읽지 못했고 손 하나 까딱하기까지 오랜 품을 들여야 했던 건 무언가 계속 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이 밀려간다는 것. 서럽게도 그만큼 현생에 치이고 있는 게 많다는 반증처럼 느껴진다.


생각을 줄이는 일은 아무리 연습해도 나아지지 않는 천성 같다. 어렸을 땐 가장 기함하던 수면을 이제 가장 편안한 상태로 꼽는 이유는 '무엇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온갖 걱정과 상념과 집착과 회피와 혐오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건 수면과 글, 술뿐이었다. 반면 글은 그 자체만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술은 마시는 만큼 수명 단축에 확실한 효과를 보일 것이 뻔하기에 의존보단 가끔의 공생이 더 현명하다. 지난 몇 주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낮잠을 자고 또다시 저녁잠을 자는, 그야말로 에너지를 내는 게 기이한 현상 속에 있었다.


매일 '왜 이렇게 잘까, 왜 누군가를 대면하는 일이 더 힘들게 느껴질까'속으로 되뇌었지만, 사실 수면이 몰아치고 사람들에게서 발을 돌리게 되는 이유는 뻔했다. 뇌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막대했으니까. 당장 한 달 안에 결정해야 하는 장장 1년의 큰 사건이 코앞에 걸려있고 여러 미래가 불러오는 압박에 숨이 거하게 차오르는데, 정상적인 몸으로 생활하는 건 크나큰 욕심이다. 욕심인데, 욕심은 또 욕심을 불러오고 결국 그 끝은 자기혐오로 파국이 되어버리고 마는 일련의 과정. 사람 곁에는 적당히만 가깝고 싶었다.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혼자 간 카페에서 주변인들과의 얕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딱 그 정도.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처음 안 정도에서의 움직임이 제일 좋았다. 사람을 만남으로써 또 다른 고민이 차오르게 두는 게,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 같았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 발로 콩콩 뛰는 것이랄지. 누구도 뇌의 상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의중은 묻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날 지키지 못하는 일은 자학이랄 수밖에 없다.


행복과 그다지 가깝지 않은 뻔한 미래 두 가지를 들고 저울질하다 보니 크기는 늘어만 갔고 가운데에 서있는 내 무릎만 아파졌다. 언젠가 들고 있는 두 손마저 부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난 또다시 잠을 자고 있을까, 수십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술에 취해 거리를 걷고 있을까. 손발이 부르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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