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서 Aug 16. 2023

부끄러운 핑계

책상 앞에 앉은 지는 오래다. 단지 쓰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제대로 쓴 게 아니라고 해야 맞을까. 어쨌든 창작의 시간을 길게 갖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내 글의 원천은 고난으로부터 다가온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타고나길 예술가였다고 자만하면 그것은 받아들일 만한 사실이 된다. 하지만, 깨어 나와야 할 알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적당히 슬플 땐 무얼 쓸 것인가, 설사 행복할 땐 무엇이 나의 글감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행복은 가슴에 담아두고 슬픔은 적어 멀리 보내버리기. 그것이 내 삶의 신조였기 때문에 목적이 붕 떠 있는 글은 지속성이 쉽게 닳고 만다. 슬플 때 헤어 나오기 위해 쓰던 것이, 어느새 한 번은 헤치고 건너야 할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래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짧은 글에만 매진했다. 알맹이 없는 하루 이야기, 어린아이들의 그림일기처럼 '참 즐거웠다. 참~ 기뻤다.'로 끝나는 말들. 최소한의 예의로 쓰인 짧은 낱말. 어느새 유튜브 시청기록에는 수백 개의 숏츠 영상들이 도배되어 있고, 영상 없인 그 짧은 일기조차 쓰기 외로워지는 시기가 이어졌다. 대체 무얼 그리워하기에 외로워할까. 사람들의 말소리, 숨소리가 들려야만 내 이야기가 들리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가슴 한편에는 자꾸 뿌리내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쌓인 낙엽들만 쌓이고, 태우지도 버리지도 못해 난잡해진 나의 언덕. 그곳에는 이름 모를 풀뿌리들만 가득 맺혔다.


애정하는 책방 속 다 갖춰진 향과 조명 사이에 있으려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써진다. 혼자만 있던 방에서는 그렇게도 난잡하던 소음이 밖에서는 고요해진다. 나를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상대, 휴대폰이 낯설어지는 공간. 여기서는 한쪽에 유튜브 예능을 틀고 변태 같은 눈으로 피식대는 일이 불가해진다. 갑자기 대(大) 자로 뻗으러 침대에 가는 것도, 심심하답시고 늦은 대청소를 시작하는 행위도 무력해지고 만다. 

이쯤에서 내 쓰기의 원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다. 


과연 슬플 때만 쓰는 것인가? 내 진심이 정말 거기서 출발했나? 슬픈 이야기, 그것 빼곤 쓸 수 없는 인간인가?



과거를 떠올려보니 짧은 말이라도 행복을 설명하는 데에 나름 진심을 다했더랬다. 내 옷장 한쪽에 콕 박혀있는 상자에는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가 모여있는 일기장이 층층이 쌓여있다. 시간이 다 닳고 나니 재밌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는 행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보이던 옛날이 있다. 오늘은 누가 맛있는 걸 줬는데... 복도 끝에서 좋아하는 남자애와 마주쳤고... 어쩌고 저쩌고... 사담으로 가득한 빛바랜 공책이지만 분명히 기쁨을 다분히 표현하던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써 버릇했던 거라는 나름의 소수의견에 도달한 것. 


쓰는 환경이 글쓰기에 '마감'이 필수불가결한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쓰는 일은 즐거움이면서도, 고통을 수반한다. 생소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 하나의 글로 꿰어가는 것에는 늘 일정한 품이 들기에. 없던 것을 재조합해 탄생시키는 과정, 그래서 끝까지 해내는 마음을 들이지 않으면 환경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모양새가 되기 쉽다. 나는 슬픈 글만 쓰이던 것이 누군가에겐 서정적인 글만 쓰이고, 또 어떤 이는 분석하는 글만 쓰이는 익숙한 일은 그렇게 생겨난다. 그 방식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더 입체적인 글이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써야 하고, 자주 써야 하며, 많이 써야 한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일단 쓰는 것, 끄트머리가 나오기 위해 끝까지 머리를 굴리는 행위에 지침이 없어야 한다. 그제야 환경에 따라 글을 쓰는 스스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도의 합리화로 당장 쓰지 않는 이유에 근거를 마련하던 내가 눈앞에 성큼성큼.


옹졸한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늘 부끄럽다. 도망치고 싶어 진다. 심지어 보여지는 글이라면 더 그렇다. 아마추어의 글쓰기란 언제나 그렇다. 완벽하다 느껴질 때까지 비밀스러워지고 싶은데, 부족함을 드러내야만 한 사람이라도 날 알아보기 시작한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부진한 글실력을 판단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쓰기가 두려워진다. 쓰지 않는다. 이 상상의 끝은 결국 포기하는 거라, 오늘도 부끄러운 살갗을 하나 내놓는다. 나 긴 글 쓰기 게을러서 핑계 댔어요,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작가의 이전글 부러진 다리로 뛰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