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생을 단순함으로 좇아가곤 한다. '될 것이다'로 끝나는 말에는 과정이 빠져있었고 사실은 그래도 되던 나이. 우리에겐 모두 그런 때가 있었다.
한창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열풍을 타 강연 CD까지 구워 함께 판매되던 시절이 있었다. 내용은 이해도 못했으면서 세계 제일 명문대라는 곳에서 학생들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펼치던 모습에 뭣도 모르고 그저 열광하던 초등학생. 그 모습이 꿈이라는 기억 가장 먼 곳에 있다.
그 뒤엔 멀티 사회인이 되기로 했다. 100가지 꿈을 자세히 적어놓고 결국 다 이뤄냈다는 책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책이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긴 했던 것 같다. 멋지다는 모든 진로는 다 때려 박아버리곤 했다.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그 내용으로 책을 내어 작가로 활동하고, 고고학 박사로 유네스코에서 일하겠다는… 엄청난 포부가 담긴 이야기를 떠벌려도 얼씨구 맞장구 쳐주던 어른이 있던 때도 있었다. 꿈은 크고 거창해야 한다는 말이 자주 인용되던 어린 청춘시절은 모두의 기억 아주 작은 곳간일지라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다 내 노력이 점수 하나로 판단되는 또 다른 시절을 겪으면서는, 갑자기 주변인들 대부분이 하고 싶은 일을 잃어버렸다. 대체 어디쯤에서 놓아버린 건지 다시 찾아오지도 못할 만큼 과거는 해지고 닳아있었다. 종일 진로고민에 빠져있어도 한순간 잃어버린 길을 찾기란 너무 어려워 어영부영, 그렇게 어른으로 넘어온 청춘은 한아름쯤 될 것이다. 나와 함께 과거 어딘가에 빠져버린 우리가 지금도 어딘가서 실컷 허우적대고 있을 테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 또 다른 일을 하나 더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하고 싶어서 랬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은 세상과 조금 타협하고, 시야도 조금 넓혀보고 하는 노력이 신선한 충격이면서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마냥 행복할 거라고, 사실은 아직도 어린 시절 생각을 못 버린 것이다.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생계유지에도 탁월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그렇게 완벽한 '덕업일치'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언제나 예외는 있다)은 일정량의 인내와 포기와 타협점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모든 걸 바라 어느 것도 포기할 줄 모르는 무모함. 여전히 노력 없는 "All is well."을 외치며 버티는 터무니없는 깡 같은.
무모함이 청춘은 맞다만 그것만 믿고 살아가다간 꼭 깊이 낙하하는 지점이 생겨나고 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앞에 작은 방지턱 몇 개 세워두는 것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하기 위한 오늘의 무모함은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삽질해 보는 것이다. 내가 찾던 미래일지는 모르지만 우선 미친 듯이 길을 찾는 근육이 훈장처럼 남겨져야 한다. 그래야 어느 지점에 낙하하더라도 살포시 내려앉아 다시 올라설 길을 찾을 수 있다.
오늘 일기에는 '내 안에 글감이 없다는 걸 태도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적었다.
다들 좋아하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