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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Aug 30. 2023

받은 마음은 그렇게 회신되어야 한다

무서울 만큼 힘든 날이었다. 우선 싫어하는 비가 며칠간 계속되고 있었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 누워있는 일은 너무 고단했고, 몸 하나 까딱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죽도록 미웠다. 오후에는 <트루먼쇼>를 봤다. 세상이 그를 감시하는 것과 내가 나를 감시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많이 닿아있었다.


저녁에는 책방을 지키러 가야 했다. 일어나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마음가짐을 해야 했다.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모든 걸 소진한 듯 마음이 무너진 날. 이유도 모른 채 멍을 때려야만 그나마 숨 쉬는 것을 잊을 수 있는 날. 그런 날은 거의 없었으므로 유독 이상했다. 갈수록 무기력과 우울감에는 이유가 사라졌다. 슬플 만한 사건도 없고, 힘들다 느낄만한 이유조차 한 점 없을 때. 그때가 사실은 가장 힘들다는 걸 그동안은 몰랐다. 울면 그만이었고, 뛰어가던 꼬리를 잡으면 그만이었기에.


보고 또 보고 질려도 며칠 뒤면 다시 볼 수 있는 지독한 반복의지를 소유했지만(좋아하는 무한도전 에피소드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세어보고 싶다. 손으로 세어보려면 다섯 사람은 족히 필요하지 않을까.) 화면 속 어느 말장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말을 잊은 채 노래를 듣고, 듣기 좋던 노래도 우울한 음악이 되어 다시 그 안에 갇히곤 했다.


물기 젖은 옷을 피하려 반바지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막힌 기둥이 되어 비가 잔뜩 묻은 다리는 작은 심신에 꽤 환기가 되었다. 비 때문에 화내놓고 이젠 그 때문에 조금 나았다니, 더 짜증 났다. 마음은 연약해 자꾸 툭툭 끊겼다. 차라리 심장과 뇌를 양손에 싸들고 걷고 싶었다. 연약해 빠진 두 것은 함께 있을 때 힘을 키웠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는 전날 다른 곳에 빼두었던 카드가 떠올랐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지독하게 멀게 느껴져 바닥에 앉아 빽빽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으나 떠올려보니 난 스물둘이었다. 불규칙한 숨을 고르는 순간이 점점 잦아졌다.


그날은 난생처음으로 임산부석에 앉은 날이었다. 사람으로 빡빡한 네모칸, 그 위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세모난 걸 잡고 있다가 자꾸만 다리 힘이 풀렸더랬다. 유독 이상한 날인 것은 맞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주한 상황이라면 익숙했지만 출발부터 중심을 잃고 정신이 멍해지는 건 새로운 진입경로인 셈이었다. 비어있는 자리라곤 멀리 떨어져 있던 분홍좌석뿐이라, 비척비척 앉아 내달리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진정이 안 됐다. 공공장소에서 꺼이꺼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더러 울고 싶어 지는 엄마 마냥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묻고 싶었다. 이대로 잘 도착할 수 있을까, 일은 무사하게 마칠 수 있을까, 마음은 자꾸 무서움으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 몸 어디 안 좋으세요? 괜찮아요?


고개를 들고 보니, 단정한 옷에 예쁜 얼굴의 여자분이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요'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누가 봐도 안 괜찮은 모습으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경이 많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가냐며, 자기도 그 역까지 가는데 같이 이야기하면서 가자고 했다. 이야기하는 게 꽤 도움이 되더라며. 힘들면 중간에 내려도 괜찮다고, 종종 내 상태를 물으며 그분은 정말 마지막 역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그 앞에서 자꾸 눈물이 났다.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왜 우느냐고 물을 때, 감사해서 그렇다고 했다. 정신이 조금만 더 살아있었으면 길게 대답했을 테다.


- 사실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서 자꾸 혼자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는 게 버거웠는데, 마냥 혼자는 아니구나. 그게 감사해서요.


먼 길 퇴근 시간이었다. 그녀는 분명 편한 자리에 있었다. 속으로만 안타까워할 수도 있었고 시선을 거둘 수도 있었다. 심지어 새벽 비행기에 오르고 내려 약속장소로 향하던, 나보다 지친 몸이었을 승무원이었다. 낯선 사람도 아닌 모르는 사람에게 치마 입은 몸을 한껏 쭈그려 눈 맞춰준 그 깊이에 자꾸만 눈이 시렸다. 자기도 그런 적이 있었고, 비행기에서도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서 계속 마음이 쓰였다고. 근데 말 걸어드리고 함께 있어주면 신기하게 괜찮아지더라며. 상태를 알아주는 것만으로 기적 같던 일이 마음을 써줌으로 천운 같은 일이 되었다. 성내던 가슴이 어느 역에 내려 헤어질 때 즈음엔 잠잠해있었다.


방금 전 일이 먼 과거처럼 뿌옇게 느껴졌다. 혹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과호흡으로 정신이 없어 어떻게 왔는지 한참을 가늠해야 했다. 뿌옇던 막이 다시 깨끗해졌을 땐 이미 그녀와 헤어지고 출구로 나오던 길이었다. 못한 말이 떠올랐고,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었던 상황이 생각났고, 미안함일지 고마움일지 혹은 다행스러움일지 알 수 없는 겹친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와 눈물이 났다. 혼자일 거라 믿던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것이, 베베 꼬여있던 두툼-한 꽈배기를 누가 쏙닥 잘라준 기분이 들었다. 너무 기니까 그만 여기서 잘라보라는 듯이. 그러니까 너무 힘들지 않게 누군가 차가운 바람을 넣어준 것 같아서, 이름 한 번 물어보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낸 것이 못내 아쉽다. 이 힘이라면 베베 꼬이던 몸도 이내 반대로 돌아 제자리로 올 수 있겠다고, 그리고 긴 힘이 되어 곳곳에서 형태를 바꾼 또 다른 모양새로 나를 지켜줄 테라고. 나는 받아온 마음을 그렇게 해석했다.


한때는 돕는 마음에 정성을 쏟곤 했었다. 그 때는 행동으로 옮겼고, 지금은 마음에 담으며 부끄러워한다. 예전엔 기꺼이 시간과 돈을 써 돕는 것에 익숙했으나, 현재는 애써 눈을 돌려 씻기지 않는 죄책감을 합리화로 벅벅 긁어낸다. 내 다리가 편한 게 먼저고, 내 팍팍한 돈이 우선이고, 내 귀한 시간이 앞섰다. 언제부터 이렇게 얄팍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녀가 쏟아준 마음을 바라보면서 그랬던 날이 한없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느 비행기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를 뿌듯하게 일기장에 적어보겠다 했다. 그 맑던 얼굴을 오래오래 기억에 그리어 꼭 다시 보겠다고, 그땐 전하지 못한 말을 마침내 이어보겠다고 혼자 긴긴 인연을 약속했다.

잊어 쪼그라들어 있던 품을 다시 꺼내야겠다. 받은 마음은 그렇게 회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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